한줄 詩

다시 아가씨로 돌아갈 수 있다면 - 김병심

마루안 2018. 8. 7. 22:39



다시 아가씨로 돌아갈 수 있다면 - 김병심



남자를 위해 예뻐지려고
남자를 기다리며 시간을 허비하려고
애쓰지 않겠다


나를 위해 예뻐지고
나의 견고한 이름을 위해 시간을 쓰겠다
노을 가까운 창에서 혼자만의 사색을 하고
거울 앞에서 나를 칭찬하는 찬사를 연습하겠다
값비싼 양복과 넥타이를 선물하려고
야간근무를 지원하지 않겠다


남자의 가족과 어머니의 마음에 들려고
내 어머니가 들려준 땅의 전설과
내 아버지와 함께 가진 종교를 버리지 않겠다
섬의 족보를 버리고
검은 피부와 소금기 머금은 몸매를 하얗게 바꾸지 않겠다


내가 좀 더 현명한 아가씨로 돌아간다면
젊음의 노트에
당신으로 시작하는 얼룩진 연애편지 대신
나에게 보내는 응원으로 채울 것이다


평생 '누구의'로 시작하는 이름표를 달 줄 알았다면
잠시 가진 내 이름의 청춘을
남자의 그늘이 되려고 애쓰지 않았을 것을



*시집, 사랑은 피고 지는 일이라 생각했다, 도서출판 각








매미의 살림 - 김병심



TV리모컨과 각자의 핸드폰만 있는 아내와 남편 사이
밥은?
아이는?
알았어....


각자의 방에 들어가 잠을 자고
아이의 기척에 촉을 세우다가
만 원짜리 지폐를 봉헌하고
돌려막느라 아찔한 카드를 내어주고
학교와 학원 근처로 이사를 다니고


게임과 핸드폰으로 밤을 지새운 아이가
만들어 준 두 번째 낙원에서
아내와 남편은 뱀이 따준 복제된 선악과를 먹고
낯설어지는 사이


아내와 남편은 죽은 말만 하고
엄마와 아빠의 말만 진짜 같은 거실
혼자 가다듬은 옷차림으로
각자의 방에서 낙원을 찾던 맹인과 귀머거리가 나오는
TV를 쳐다보는 아이에게
얼른 어른이 되라고 말하는 사이


7일 동안
바가지와 악다구니를 하려고
낙원을 바꾼 살림엔 거미줄이 늘고
탄력 대신 생기 잃은 주름으로
귀담아 듣기 전의 노래가 울음으로 남은 허물
아이에게 들키곤 했던 오래된 낙원은 어디로 갔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