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3890

빨랫줄 - 서정춘

빨랫줄 - 서정춘 그것은, 하늘아래 처음 본 문장의 첫줄 같다 그것은, 하늘아래 이쪽과 저쪽에서 길게 당겨주는 힘줄 같은 것 이 한 줄에 걸린 것은 빨래만이 아니다 봄바람이 걸리면 연분홍 치마가 휘날려도 좋고 비가 와서 걸리면 떨어질까 말까 물방울은 즐겁다 그러나, 하늘아래 이쪽과 저쪽에서 당겨주는 힘 그 첫줄에 걸린 것은 바람이 옷 벗는 소리 한 줄 뿐이다 *시집, 물방울은 즐겁다, 천년의시작 첫사랑 - 서정춘 가난뱅이 딸집 순금이 있었다 가난뱅이 말집 춘봉이 있었다 순금이 이빨로 깨트려 준 눈깔사탕 춘봉이 받아먹고 자지러지게 좋았다 여기, 간신히 늙어버린 춘봉이 입안에 순금이 이름 아직 고여 있다 # 서정춘 시인은 1941 전남 순천 출생으로 1968년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 , , 등이 ..

한줄 詩 2018.08.06

노을 - 이태관

노을 - 이태관 매미가 우는 건 땅을 떠난 슬픔 때문이다 흙을 떠나 홀로 세상에 던져졌다는 것이 저리도 천둥 울음을 만들어낸다 길을 잃고 바람을 따라 끝없이 떠돌고 싶었던 건 낯선 곳에서도 말없이 나를 받아주는 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낡은 신발에 이끌려 그들도 언젠가는 나그네, 햇살에 타 내리는 저 푸른 울음들 속에서 하늘과 땅이 하나가 되는 순간들 만나게 될 것이다 적막 같은 어둠이 몰려 왔다 그 어둠 속으로 매미 한 마리 홀로 흙으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시집, 나라는 타자, 북인 나라는 타자 - 이태관 나는 고뇌하는 수도승 바람 많은 언덕에 탑을 세우고 세상이 들려주는 이야기 듣기 위해 문패는 하늘에 걸어두었지 온 몸이 십자가인 가지 위 나뭇잎 등잔 하나 매달고 또로록 개암나무 열매 굴리면 하루가 ..

한줄 詩 2018.08.04

그림자를 잃은 사나이 - 천세진

그림자를 잃은 사나이 - 천세진 오랫동안 지켰던 자리에서 일어나기 전 잠시 먹먹해졌다 졸업앨범에서 발견되는 이들처럼 떠나는 이도 남는 이도 곧 흐릿해질 것이다 전화가 울렸다 몇 번을 더 울리고 소리는 멎었다 사무실에 어둠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책상 서랍에서 오랫동안 쓰지 않았던 만년필을 발견했다 만년필의 양식은 오랫동안 쓰이지 않았다 좀체 열리지 않는 뚜껑을 열고 흔들어보지만 잉크는 오래 전 말라버렸다 토해 낼 수 없었던 말들도 껍질을 벗지 못하고 화석이 되었을 것이다 양식이 폐기된 것을 이제 알게 된 것뿐이다 만년필을 챙겨 넣고 마지막으로 달력을 집어 들었다 장마다 붉은 펜으로 여러 개의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었다 남겨둔다 해도 누구도 붉은 동그라미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달력을 폐지 더미 속에 집어넣었다..

한줄 詩 2018.08.04

한 소년이 지나갔다 - 김점용

한 소년이 지나갔다 - 김점용 저만치서 한 소년이 마주 오고 있었다 더벅머리에 교복을 입고 검은 가방을 메고 흰 양말에 삼디다스 슬리퍼를 질질 끌며 불량한 걸음걸이로 나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고개를 약간 숙이고 주머니 깊이 두 손을 찌르고 껄렁껄렁 가까워지고 있었다 누구나 저럴 때가 있는 법이지 굴러다니는 빈 깡통을 콱 찍어 차버리듯 세상을 온통 찌그러뜨리고 싶은 시절 어이 학생, 한마디 해줄까 망설이는 사이 소년이 나를 툭 치고 지나갔다 가볍게 툭, 뽀얀 젖살 같은 얼굴로 야릇한 오징어 냄새를 풍기면서 내 어깨를 툭 치고 지나갔다 가볍게 툭, 날 고의적으로 들이받고 지나갔다 나에게 시비를 걸어 싸움을 걸어 날 때려눕힌 뒤 새파란 주머니칼로 온몸을 난자하고 팔딱이는 내 심장을 꺼내 갔다 가볍게 툭, 오..

한줄 詩 2018.08.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