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홀연 - 이승희

마루안 2018. 8. 8. 19:39



홀연 - 이승희



보이지 않아도 닿을 때 있지
우리 같이 살자 응?
그렇게 말하는 사람을 만나면
기차를 타고
어디든 데려다주고 싶다고 생각하다가
아직 없는 손들에게 쥐어주는 마음 같아서
홀연하다
만져지지 않아도
지금쯤 그 골목의 끝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고
흔들리는 손가락의 미래들
나도 누군가의 홀연이었을까


같이 썩어가고 싶은 마음처럼
매달린 채 익어가는 별
너 때문에 살았다고
끝없이 미뤄둔 말들이 있었다고
사라진 행성이 그리운 금요일이면
없는 손의 기억으로
나는 혼자
방금 내게 닿았다가
지금 막 떠난 세계에 대해
잠시 따뜻했던 그것의 긴 머리카락을 떠올린다


어제의 식물들은 금요일을 매단 채 죽어 있다
그것은
원래 내게 없던 문장들
그러니까 나는 여전히 혼자 남았다는 말
점 하나가 붙잡고 있는 세계라는 말



*시집, 여름이 나에게 시킨 일, 문예중앙








여름 - 이승희



1
그러니까 여름은 당신이 이 세상에 보낸 모든 질문들에 대한 답장. 잠긴 문이 잠긴 채로 저물어가더라도 그런 모두 당신이 쓴 편지들에 대한 답장. 어느 골목에서 멈칫했던 시간들이 얼마 뒤 먼 고장에서 비로 내리게 되는 일 혹은 이제 그만 살까? 우리 참 많이 살았다고 유리창에 대고 고백하는 일도 당신이 오래전에 쓴 편지들에 대한 답장들


2
세상을 오므려 꽃 한 송이 속에 밀어 넣으려면 오후 3시쯤이 좋을 것 같아요. 그러면 2시부터는 기차를 타려는 사람들이 조금씩 기울어지겠지요. 아뇨, 당신은 그래도 계속 편지를 쓰세요. 3시까지는 아직 멀었거든요. 또 다른 지구는 필요하지 않아요. 그건 여름이라 그래요. 너무 소란스럽지 않게 천천히 점심을 먹고 깊은 잠을 자도록 해봐요


3
거기서 뭐하냐고 물었습니다. 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렇게 잠시 시간이 흐르고, 그래서 좋으냐고 물었습니다. 당신이 좋으면 좋겠다고 대답했습니다. 이 융성해지는 폐허에 대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