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3890

횡단보도 앞에서 - 최준

횡단보도 앞에서 - 최준 -나 없는 세상에 던진다 길게 고민해 볼 가치도 없다 삶이란 길 건너기와 다름아닌 것 오, 하지만 한 마리 날벌레가 천만 번 날갯짓 쳐 이승의 푸른 강둑에 안착하는 일 생각하면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등 쳐다보는 눈의 알은 얼마나 큰 獨善으로 반짝이는지 길 건너는 법을 마스터한 모든 짐승은, 위기감 속에서만 비로소 짐승다워진다는 사실을, 마스터하고부터 나는 마스터베이션을 배웠다 뒤늦게 自慰를 알았던 것이다 法道 속에서 소멸한 순수 양심의 아버지인 내 안의 아들아 어떡하면 이 사회가 제 환부를 제 손으로 도려내어 아픈 너 아픈 너의 아픔을 치유할 수 있겠느냐 대답해 다오 생각이 길면 뒤쳐진다는 사실을 증명하듯 나는 놓친 것이다 한순간 헛생각이 몸을 붙들어 놓는 통에 진즉 건너야 마땅했..

한줄 詩 2019.08.09

보름달이 걸리다 - 서화성

보름달이 걸리다 - 서화성 고향이 같은 사람은 피를 모으면 같은 쪽으로 쏠린다고 했다 내 고향은 지금도 그때 매미가 울고 있을 것이며 하늘에 매단 붉은 사과처럼 심장은 뜨거울 것이며 탱탱한 보름달이 두둥실 떠다니고 있을 것이다 어느새 하얀 쌀밥이 달그락 달그락 익어가는 저녁, 끼니를 잊은 채 옆집 숙이는 하늘을 이고 해가 떨어지는 줄 몰랐다 돛을 단 고무신은 어디로 떠갔는지 몰랐다 호랑이가 담배를 피웠다는 이야기에서 어제보다 목이 길어진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을까 웃음소리가 추억을 사각사각 갉아 먹고 있었다 양치기소년 때문에, 저 멀리 은하수를 놓자 한 폭의 수채화가 되었다 순간, 별똥별이 떨어지는 내 고향에서 사라졌다 매캐한 모깃불 탓에 삼삼오오 하늘을 덮은 아이들 휭하니 페가수스 한 쌍이 날아간다 논두..

한줄 詩 2019.08.08

영등포 - 신동호

영등포 - 신동호 골목은 낡은 신발들과 함께 깊어갔다 여기선 가난이 곰삭은 김치같이 맛있다 영등포엔 편의점이 없는데 국수집 간판이 골목 안쪽으로 숨었는데 가끔 선호하는 담배를 살 수 없는데 불편함이 마누라의 잔소리같이 정겹다 낡은 기계들이 수리공의 손에서 숨쉬고 영등포엔 버려지는 게 없다 늙은 아버지의 손에선 과일향이 난다 쓰레기가 오랜 친구같이 들락날락한다 골목 끝에 깊은 우물이 보인다면 거기가 영등포, 가난하지만 맑게 흔들리는 얼굴이 있다. *시집, 장촌냉면집 아저씨는어디 갔을까?, 실천문학사 영등포에서 보낸 한 철 - 신동호 낙타는 발자국을 남기며 걸었다. 사막은 뜨거웠고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바람을 따라 민주주의는 자주 자리를 옮겨 다녔다. 모래언덕을 오르며 뒷걸음칠 때 마른번개가 몰아쳐왔다. ..

한줄 詩 2019.08.06

지렁이 꽃 - 김남권

지렁이 꽃 - 김남권 눈 속에서 바람의 은신처를 찾았다 사람이 태어나고 바람의 주검이 머무는 지렁이의 길을 따라 막장으로 들어갔다 햇빛이 없어 안심되기는 처음 축축한 하늘이 맨살에 닿고 온몸의 세포가 깨어난다 눈을 감았다 지렁이의 길은 눈을 감아야 갈 수 있는 곳 눈을 감아야만 눈이 멀지 않는다 지렁이의 하늘이 내려앉았다 지렁이가 운다 비가 흙의 잠을 깨운다 바람의 숨구멍이 열릴 때를 기다려야 한다 지렁이의 분변이 드디어 민들레를 밀어 올렸다 아 , 하고 열리는 하늘 지렁이의 눈을 닮은 민들레의 떡잎 지렁이를 따라 간 사람의 눈썹이다. *시집, 저 홀로 뜨거워지는 모든 것들에게, 밥북 노잣돈, 삼천 원 벌기 - 김남권 낡은 손수레가 빨강 신호등 앞으로 간다 폐지를 가득 싣고, 그 위에 눈을 싣고 도로를 ..

한줄 詩 2019.08.03

집밥 들밥 - 이성배

집밥 들밥 - 이성배 삼 년 전 귀농해서 구절초 농사를 짓는 김 선생은 이제 몸도 건강하다. 오랜만에 올라와 데려간 허름한 골목식당, 청국장 한술 뜨더니 어머니가 끓여주던 맛이라며 눈알을 부라린다. 나도 따라 지긋이 눈 감아 본다. 수수 빗자루, 지게 작대기가 번쩍 하더니 눈물이 찔끔 날 것 같다. 자기 땅 한 평 없이 사계절을 나는 동안 어머니의 반찬은 찬물이거나 짠지이거나 허기였으나 그래도 집밥이라면 한 가지쯤 없으랴. 언 땅보다 먼저 허기가 풀린 뒷동산에서 캐 먹던 칡뿌리, 뱀 나온다고 가지 말라던 찔레 덤불의 어린 순, 한두 번쯤 밭두렁으로 굴러 박히며 따먹던 오동개, 들밥만 먹은 나에게 집밥은 참 부러운 반찬이다. 김 선생에게 구절초 조청에서 칡 맛이 난다고 질겅질겅 웃어 주었더니 알 듯 모를 ..

한줄 詩 2019.08.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