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횡단보도 앞에서 - 최준

마루안 2019. 8. 9. 21:42

 

 

횡단보도 앞에서 - 최준

-나 없는 세상에 던진다

 

 

길게 고민해 볼 가치도 없다 삶이란

길 건너기와 다름아닌 것

 

오, 하지만 한 마리 날벌레가

천만 번 날갯짓 쳐 이승의 푸른 강둑에

안착하는 일 생각하면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등 쳐다보는 눈의 알은

얼마나 큰 獨善으로 반짝이는지

 

길 건너는 법을 마스터한

모든 짐승은, 위기감 속에서만 비로소

짐승다워진다는 사실을, 마스터하고부터

나는 마스터베이션을 배웠다 뒤늦게

自慰를 알았던 것이다

法道 속에서 소멸한 순수

양심의 아버지인 내 안의 아들아

어떡하면 이 사회가

제 환부를 제 손으로 도려내어 아픈 너

아픈 너의 아픔을 치유할 수 있겠느냐

대답해 다오

 

생각이 길면 뒤쳐진다는 사실을 증명하듯

나는 놓친 것이다 한순간

헛생각이 몸을 붙들어 놓는 통에

진즉 건너야 마땅했을 길로 휙, 휙,

망설임 없이 굴러가는 바뮈들

(내 길을 내가 지웠구나!)

 

길 건너의 신호등이 붉은 눈 부릅뜨고

똑바로 가거라 불쌍한 것

法道가 곧 正道는 아니잖느냐

보여 주면서

 

 

*시집, 나 없는 세상에 던진다, 고려원

 

 

 

 

 

 

탑골공원 - 최준

-나 없는 세상에 던진다

 

 

雨期를 살아 낸

팔월의 나무는 독재자다

천 년 비와 바람이 천둥 쳐 세운

탑골공원

아침 길에 주워 온 신문을 깔고 앉아

여생을 새김질하는

새우등의 노인들

 

나무의 그늘 짙어지면 화투를 치지요

空山에 明月 뜨고 지는 세월이나 죽이지요

염천을 이고 오는

김밥 아줌마를 기다리지요

열매 떨어지고 잎새만 무성한

팔월의 벚나무

그 녹음 아래 노인네들 앉았습니다

 

甲子 지나도록 어디를 돌고 돌다

학수고대하던 무임승차의 시절입니까

투탄카멘- 고대 미이라의

금빛 갑옷은 주름이 지지 않는데

 

저 주름진 홍살문으로 난 길

흘싸리 껍질 하나의 허공을 질러

새 지나간 자국 이제 보인다고

한 노인이 손 들어 가리키는

녹음 너머의 세상

아아, 그 움푹한 눈이 곧 환멸인 것을

 

돌아보지 마세요 잎새

무성한 팔월의 나무였던 한때

法이, 律을 기쓰고 지워 간 흔적

지난 王朝는

언제나 그런 독재의 날들이었으니

 

 

 

 

# 최준 시인은 1963년 강원도 정선 출생으로 경희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1990년 <문학사상> 시 부문 신인상에 당선되고, 1995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조 부문에 당선되었다. 시집으로 <개>, <나 없는 세상에 던진다>, <뿔라부안라뚜 해안의 고양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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