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흐린 날 같은 심정 - 이생진

마루안 2019. 8. 6. 22:49



흐린 날 같은 심정 - 이생진



하늘이 울 것 같다
금방 눈물이 소나기 쏟듯 쏟아놓을 것 같다
침울하다
나는 왜 이리도 쉽게 하늘을 닮아갈까
하고 하늘처럼 침울해진다
누군가 유쾌한 사람이 카톡이라도 톡하고 건드렸으면 좋겠다
내 지금의 심정을 바꿔놓게
그도 그랬다고 칵 하고 토해낼 것 같다
날씨가 흐리다
아무에게서도 카톡이 오지 않는다
나 같은 사람이 없다는 것이겠지
나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겠지
하늘은 어둡고 나는 침울하고
오늘은 내게 관심이 있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
목욕탕에 들어가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을 보는 편이 낫겠다
톡하고 떨어지는 물방울
나도 톡하고 떨어지면 어디에 떨어질까
톡 떨어지면



*이생진 시집, 무연고, 작가정신








병(病)과 나 - 이생진



병 없이 살면 얼마나 좋을까
그건 망상이다
살면서 마음을 비운다고 하지만
그게 쉬운 일이 아니다
내가 지금 멀쩡해 보이지만 속은 다 상했다
내가 지금 복용하는 약만 봐도
전립선 약과 바이타민
오- 쏘팔메토(건강기능식품)
센담(이거 역시 전립선 기능성 식품)
자트랄(병원 처방, 전립선 비대증 치료제)
프로스카(병원 처방, 전립선 비대증 치료제)
그리고 엑세라민 B(섬에서 만난 약사가 보내준 것)
그리고 안과병원에서 처방해준 약
가리유니(노인성 백내장 치료제)
플루메토론 0,1(점안액)
하메론(각결막 상피장애 치료제)


무엇보다 전립선 약이 주다
늙으면 전립선이 주다 그래도
남들보다는 적게 약을 쓰는 편이란다


젊어서 섬으로 돌아다닌 탓에
팔과 얼굴이 검버섯 숲이다
그러니 피부약도 한둘이 아니다


어찌 보면 자꾸 살려고 떼쓰는 것 같아
치사하기도 하다






머리말


나이 90이 되니 알 것 같다
살아서 행복하다는 것과
살아서 고맙다는 것을
그러고 보니 이제 철이 드나 보다
이런 결말에 결론 비슷한 말을 할 수 있는 자신감은 어디서 나왔을까


거기엔 조건이 있다
첫째 건강해야 한다는 것과
둘째 90이 되어도 제 밥그릇은 제 손으로 챙겨야 한다는 것과
셋째 밥 먹듯 시를 써가며 살아야 한다는 것
그리고 제정신으로 걸어가야 한다는 것
(후략)



# 머리말이 인상 깊다. 70줄에 치매로 요양원에서 남이 떠주는 밥을 넘기는 사람이 있고 똥오줌 받아내게 하면서 몇 년째 온 가족을 지치게 만드는 사람도 있다. 하긴 제 스스로 걸을 줄 알아도 태극기 들고 세상물정 모르는 사람도 있으니,, 중년에 접어들고부터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말이 나이값 못한다는 소리 듣는 것이다. 나이는 가만 있어도 먹지만 지혜는 거저 생기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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