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움직이는 자화상 - 안태현

마루안 2019. 8. 3. 22:20



움직이는 자화상 - 안태현



그림자가 끓어 넘치는 한낮이다
운동장에서 공을 좇아 갈증을 물고 달리는 빨강 파랑 조끼들
혈안이 한 곳에 모인다


지중해를 건너와 밀입국 냄새를 지우려는 아프리카 소년들처럼 잘 익어서 쏟아지기 직전의 망고 향처럼
색깔들이 섞인다


골과 어긋난 방향이란 우연에 가깝고
방향이 바뀔 때마다
판을 휘어잡으려 우르르 뭉치거나 어설프게 들뜨는 색깔들


밀집 사이로 생쥐같이 빠져나가는 공을 보면
실마리를 찾지 못하는 조끼들의 배후에 요령이라 부르는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


라인이란 라인은 다 지우고 여러 개의 공을 동시에 던져준다면


거친 숨이 턱밑까지 차오른 조끼들은
아귀다툼을 잊고
사방으로 펼쳐진 숲과 바다와 사막에서 모든 계절의 과실을 한꺼번에 보게 되는 것일까


색깔은 세상을 껴안는 감정이라서
나의 이해심을 넘어선 너의 적개심이 진짜일지 모르니까 정강이를 감싼 채 나뒹굴기도 하는
저 불가피한 양식


차차 흐려져서 눈살이 찌푸려지는 여기는 어디인가
네가 바라볼 때 아픈 것을 다 보여준 듯해도
은밀한 것은 남아
색깔은 오랫동안 길들여져 변치 않을 것처럼 보인다



*시집, 저녁 무렵에 모자 달래기, 시로여는세상








구석 - 안태현



소심하지만 나는 이곳을 사랑한다
어쩌다 찾아들기도 하는


아직 소꿉이 그대로 남아있나
닦지 못한 눈물이 여전히 마르고 있나


눅눅한 공기처럼
일종의 도피에 가까운 이곳은 쓸데없이 따라온 것들이 많아서 항상 자리가 비좁다


깨지고 뭉쳐졌다 흩어지는


나와 내가 아닌 것 사이에서 달래야 하는 일과 달래지 말아야 하는 일 사이에서 격렬해진다


스스로 터득해서
나를 조금씩 움직이는 무기를 만들고 가까운 너도 잘 모르게 웃음으로 위장을 한다


구석이 아닌 것처럼 자세를 바꾸면 모든 게 바뀐다고 하는데
두 손을 들면
영원히 백기처럼 보이는


꾀병처럼 편한 곳


나는 어딘지 색깔이 변했는데 밤거리를 걷는 사람들은 아무도 몰라보고
결국 홀로 돌아가는 무채색 둥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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