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이 어둠이 아닌 이곳 - 이응준

마루안 2019. 8. 8. 22:05



이 어둠이 아닌 이곳 - 이응준



네가 무너져 버렸다는 소식을
멀리서 우연히 들었다.
오래전 나는 사랑하는 너에게 세상과의 분쟁을 주었으나
맹렬했던 나는 미움마저 고갈되었다.
가장 쓸쓸한 이날에
이 어둠이 아닌 이곳에서
아무도
어느 누구도
내가 작은 창문 이상의 것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모른다면, 나는
일생에 단 한 번 사랑을 한 적이 없고
단 한 번 사랑을 이야기한 적도 없어서
오직 이 말 뒤의 침묵만을 믿어야 한다.


그 누가 나의 무엇을 옹호해 줄 것인가.
네가 무너져 버렸다는 소식을
멀리서 우연히 들었다.



*시집, <목화, 어두운 마음의 깊이>, 민음사








악덕에 관한 보고서 - 이응준



그때 그 사람은 얼마나 힘들었던 것일까.
무심코 어둠 속에 앉아 있다가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은
이유를 불문하고 허황된 것들이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칼과 불을 들고 샅샅이
뒤지고 돌아다녀 봐도
딱 피아노 한 대만 놓인 사막 같은 이 세상.
지옥을 알게 되면 천국을 알게 되고
천국을 알았으니 지옥을 잊게 될 줄 알았건만
아무리 피에 젖어
아무리 재에 뒤덮여 간절히
헤맨다고 한들 오직
하나님의 침묵만이 멍한 내 가슴, 이 세상.


이해한다는 것은 노골적인 것.
더 이상은 아름다울 수가 없어서
완전한 이별이 되었다.


그때 그 사람은 지금의 나처럼 힘들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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