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지렁이 꽃 - 김남권

마루안 2019. 8. 3. 21:55

 

 

지렁이 꽃 - 김남권


눈 속에서 바람의 은신처를 찾았다
사람이 태어나고 바람의 주검이 머무는
지렁이의 길을 따라 막장으로 들어갔다
햇빛이 없어 안심되기는 처음
축축한 하늘이 맨살에 닿고
온몸의 세포가 깨어난다
눈을 감았다
지렁이의 길은
눈을 감아야 갈 수 있는 곳
눈을 감아야만 눈이 멀지 않는다
지렁이의 하늘이 내려앉았다
지렁이가 운다
비가 흙의 잠을 깨운다
바람의 숨구멍이 열릴 때를 기다려야 한다
지렁이의 분변이 드디어 민들레를 밀어 올렸다
아 , 하고 열리는 하늘
지렁이의 눈을 닮은 민들레의 떡잎
지렁이를 따라 간 사람의 눈썹이다.


*시집, 저 홀로 뜨거워지는 모든 것들에게, 밥북

 

 

 

 

 

 

노잣돈, 삼천 원 벌기 - 김남권

 

 

낡은 손수레가 빨강 신호등 앞으로 간다

폐지를 가득 싣고, 그 위에 눈을 싣고

도로를 가로지른다

리어카를 미는 굽은 등

눈의 무게도 할머니 등 쪽으로 굽는다

그녀의 길은 이미 하늘에 닿아 있는지

앞을 보지 않는 듯

한쪽 다리가 뱀 무늬를 새기며 간다

오래전, 통통 저 길을 뛰어 건넜을

마른 종아리가 눈에 묻혀 끌려간다

첫눈은 벌써 천눈(天目)이 된 지 오래

하늘을 이고 태어난 그녀 이제 하늘 문을 열고 있다

눈 위에 난 발자국마저 지워야 하기에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는다

저승 갈 노잣돈, 삼천 원 받으러 고물상에 들어선다

폐지 속에 누운 그녀의 눈 속에

눈(雪)의 물이 고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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