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형식적 사랑 - 현택훈

마루안 2019. 8. 6. 22:58



형식적 사랑 - 현택훈



자세가 기억에 남아 그 계단을 다시 오를 수 있어
계단 끝에 서늘한 벼랑이 있다는 걸 바람이 계단을 조각내며 일러주니까


막차가 끊긴 시간의 버스 정류장은 버스 냄새를 기억해
비 오는 날엔 물웅덩이가 다 차창이니까


보안등 불빛은 헌옷수거함을 어루만지네
몸을 기억하는 옷이 조금 들썩일 때 헌옷수거함은 옅은 숨을 쉬니까


여기라는 형식으로 버려진 선풍기는 그곳이라는 형태로 묵었던 자리에 풀이 돋지
구부정한 선풍기가 저녁달을 물끄러미 올려다보고 있었으니까


밤에 옅은 숨을 토하는 성체(成體)가 어디 한둘이어야 말이지
그림자의 모양이 건축허가표지판에 다 나와 있듯 기억은 기억을 기억하는 자정의 희망곡이니까


기억나지 않아도 바람은 계단을 오르지만
기억나지 않아도 바람은 계단을 오르지만



*시집, 난 아무 곳에도 가지 않아요, 걷는사람








흑염소 - 현택훈



아무거나 잘 먹고 추위에도 강한데 성질이 온순하다
돌계곡을 다니는데 성질이 온순하다
머리에 뿔이 나 있어도 잘 치받지 않는다
온종일 등짐 날라 등이 욱신거리는데 불평이 거의 없다
술을 마시다 아무하고나 싸울 법도 한데 휑하고 코 풀고 만다
나이가 들수록 뿔이 안으로 휜다
낡고 허름한 집을 마디하지 않는다
누명을 써도 그 누명을 벗으려고 하지 않는다
억울하면 억울한 대로 씀바귀를 뜯어 먹으며 산다
참으면 참을수록 뿔이 안으로 휜다
슈퍼 앞 평상에서 맥주를 마시고 술병을 깰 것 같은데 성질이 온순하다
술집에서 시비가 붙을 것 같을 때도 동료를 말리느라 바쁘다
아무거나 잘 먹고 추위에도 강한데 성질이 온순하다





시인의 말


이별을 슬퍼하며 청춘을 다 보내니 후회가 남는다. 헤어지고 난 후에도 밥맛을 잃지 않아서 내 사랑을 의심했다.
세상 앞에서 좀 더 의젓해야 하는데 울 궁리만 하는 난 참 어리다. 떠나는 사람을 붙잡으려 시를 썼더니 그 사람이 떠나지 않고 옆에 있다.
그 사람이 잘 떨어지지 않아 난처하다. 제발 이제, 그만 잊어야 하는데 당신은 내게 귓속말로 속삭인다. 난 아무 곳에도 가지 않아요,
난 아무 곳에도 가지 않아요. 귀를 막아도 다 들린다. 바람 소리, 귀뚜라미 우는 소리, 버스 차창에 흐르는 노랫소리, 테니스장 롤러 구르는 소리,
시집 책장 넘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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