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영등포 - 신동호

마루안 2019. 8. 6. 23:12

 

 

영등포 - 신동호


골목은 낡은 신발들과 함께 깊어갔다
여기선 가난이 곰삭은 김치같이 맛있다

영등포엔 편의점이 없는데
국수집 간판이 골목 안쪽으로 숨었는데
가끔 선호하는 담배를 살 수 없는데
불편함이 마누라의 잔소리같이 정겹다

낡은 기계들이 수리공의 손에서 숨쉬고
영등포엔 버려지는 게 없다
늙은 아버지의 손에선 과일향이 난다
쓰레기가 오랜 친구같이 들락날락한다

골목 끝에 깊은 우물이 보인다면
거기가 영등포,
가난하지만 맑게 흔들리는 얼굴이 있다.

 

 

*시집, 장촌냉면집 아저씨는어디 갔을까?, 실천문학사

 

 

 

 

 

 

영등포에서 보낸 한 철 - 신동호

 

 

낙타는 발자국을 남기며 걸었다. 사막은 뜨거웠고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바람을 따라 민주주의는 자주 자리를 옮겨 다녔다. 모래언덕을 오르며 뒷걸음칠 때 마른번개가 몰아쳐왔다. 낙타는 천둥 속으로 묵묵히 걸어갔고 나는 목도했다. 피뢰침을 머리에 꽂고 장준하가 쓰러졌다. 김근태가 무너져 내렸다. 나는 오래도록 엎드려 신을 향해 기도했으나 그들은 일어나지 못했다. 아라비아 공주는 군사들을 이끌고 위풍당당하게 걸었다. 모래 먼지가 날려 사막은 어지러웠다. 낙타가 단봉 위로 사막의 죽음을 싣고 걷는 동안 패망한 제국은 간혹 신기루처럼 떠올랐다. 타는 목마름을 참으며 나는 피뢰침을 주워 들었다.발자국을 따라 낙타를 쫃아갔으나 끝내 오아시스에 도달하지 못했다. 사막의 바람이 모래언덕을 옮겨놓고 있었다. 

 

 

 

# 신동호 시인은 1965년 강원도 화천 출생으로 한양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1984년 강원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겨울 경춘선>, <저물 무렵>, <장촌냉면집 아저씨는어디 갔을까?>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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