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선 가는 길 - 이우근 정선 가는 길 - 이우근 정선이라는 강호(江湖)에서 나의 무협적 필살기는 게으름이었다 그 게으름에 조금 바빴다 손가락 까닥 않고 증오를 종식시킬 수 있는 자유자재의 능력배양의 끝없는 수업 침묵이 주식, 호흡은 간식, 배설에는 냄새가 없었다 정선의 밤은 맑고 투명했다 이마를 쪼갤.. 한줄 詩 2020.05.09
마지막에 대하여 - 이정훈 마지막에 대하여 - 이정훈 마지막, 소리 내면 지금도 목울대에 등자 같은 게 솟아오른다 아버지만 해도 그렇지, 건빵 한봉지가 다였다니 나는 밤나무 꼭대기의 저녁 햇살이 성 엘모의 불이었다고 기억한다 폭풍 속 배의 마스트에 환했다던 그 불덩이 아버지는 건빵 한봉지를 쥐여주고 마.. 한줄 詩 2020.05.08
나뭇잎 흔들릴 때 피어나는 빛으로 - 손택수 나뭇잎 흔들릴 때 피어나는 빛으로 - 손택수 어디라도 좀 다녀와야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을 때 나무 그늘 흔들리는 걸 보겠네 병가라도 내고 싶지만 아플 틈이 어딨나 서둘러 약국을 찾고 병원을 들락거리며 병을 앓는 것도 이제는 결단이 필요한 일이 되어버렸을 때 오다가다 안면을 트.. 한줄 詩 2020.05.07
오월의 편지 - 나호열 오월의 편지 - 나호열 절뚝이며 느리게 온 봄은 목발의 발자국을 남기고 갔다 아쉬운 사람의 얼굴을 닮은 목련은 눈을 감아도 올해도 피고 지고 눈물 떨어진 자리에 자운영 행여 밟을까 먼 산 바라보면 뻐꾸기 울음소리에 푸르게 돋아 오르는 이름이 있어 나는 편지를 쓴다 외로워 별을 바라보다가 자신이 별인지 모르는 사람에게 별인지 몰라 더 외로운 사람에게 주소를 몰라도 가닿을 편지를 쓴다 심장에서 타오르는 장미 한 송이 라일락 향기에 묶었으나 그예 남은 그림자 한 장 봄이 지나간 자리에 놓인 꿈이라는 한 짝의 신발 우리는 모두 그 꽃말을 기억하고 있다 *시집/ 안녕, 베이비 박스/ 시로여는세상 몽유(夢遊) - 나호열 어떤 꽃은 제 몸을 사루면서 빛을 내밀고 또 어떤 꽃은 제 마음을 지우면서 향을 뿌리듯 허공에 .. 한줄 詩 2020.05.07
굳은살 - 한관식 굳은살 - 한관식 前生의 강나루 앞에서 깊은 다짐을 했다 질긴 인연 얽히지 않으려고 주억주억 울어대는 뱃머리에서 다시 한 번 인연 설키지 않으려고, 내 이름을 방생하며 現生 길에 올랐다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인연이라 부딪히면 현생의 인연이라 옷깃을 스쳤던 바람을 거두어 들여.. 한줄 詩 2020.05.06
무연고 대기실 - 전윤호 무연고 대기실 - 전윤호 의사는 흰 보를 씌우고 번호가 달린 서랍에 밀어 넣었다 나는 제대로 죽었다 다른 시신이 들이닥친다 산다는 건 이별을 통보받고 죽는 순서를 기다리는 것 연고자 없이 냉동고에 눕는 밤 소독약 냄새 가득한 취객들 속에서 소주잔에 성에가 낀다 인수하러 오지 않.. 한줄 詩 2020.05.03
나뭇가지의 질문법 - 박남희 나뭇가지의 질문법 - 박남희 세상이 온통 의문으로 가득 찰 때 뾰족한 것으로 허공을 찔러대기보다는 조용히 이파리를 매달 것 그 이파리로 얼굴 붉히고 그 이파리가 울다가 그 이파리로 어디론가 굴러가 다보록한 흙에게 썩는 법을 배울 것 그리하여 제 이파리 모두 떨구고 허공이 온통 .. 한줄 詩 2020.05.02
상처 - 김성장 상처 - 김성장 썰매 타다 송곳에 찢어진 손목의 상처도 그렇고 개한테 쫓기다 넘어진 무릎의 상처도 그렇고 아무는 데 오래 걸렸다 오늘 그 상처를 보다가 상처 주변의 살갗들이 상처의 색깔과 닮았음을 깨닫는다 처음 그 상처들은 상처를 메꾸고 주변의 살갗과 같아지려고 애썼을 것이.. 한줄 詩 2020.04.30
잠의 맛 - 이서화 잠의 맛 - 이서화 봄날, 양지쪽에 앉은 노인이 햇살을 주무르고 있다 늙은 개도 어린 개도 천방지축이고 뾰족뾰족 울음에 가시가 돋는 고양이도 입맛 다시는 하품 끝, 한껏 입 벌리고 잠의 맛을 보는 중, 저의 목 떨어지는 줄 모르는 선운사 동백도 짠물 민물 넘나드는 물 닮은 미끄러운 풍.. 한줄 詩 2020.04.29
숨바꼭질 - 김말화 숨바꼭질 - 김말화 말술을 들이킨 술래는 숫자도 세지 않은 채 거친 숨을 내뿜으며 숨은 식구들을 찾기 시작했다 쉬 붙잡혀야 할 엄마도 스스로 나와야 할 오빠도 꼭꼭 숨어버렸다 날이 갈수록 더욱 치밀해지는 술래 기둥이 휘청거리고 허리 꺾인 벽이 털썩 주저앉고 대청마루 아래 오빠.. 한줄 詩 2020.04.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