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3890

측백나무 그 별 - 정병근

측백나무 그 별 - 정병근 비 온 다음 날 측백나무 갈피에 한 무더기 별이 내려앉았다 삼천대천을 날아 겨우 불행의 연대에 도착한 것들 여기는 기억의 피가 도는 땅 이별의 체온이 상속되는 곳 쉽게 입이 삐뚤어지고 뼈가 뒤틀리는 건 허기를 후비는 바람 때문 눈은 한쪽으로만 기울지 생각하지 마라 왔던 곳으로 돌아가려면 굽은 다리와 꼬부라진 등으로 측백측백측백을 하늘의 별만큼 외어야 한다 바람에 흔들리는 측백나무 어린 머릿내가 코를 찌른다 울타리 밑에 분분한 덩굴장미 꽃잎 꽃이 피고 지는 별에 살았다고 구전하리라 물의 비가 내리는 지붕 밑에서 밥이라는 밥을 먹었다고 들려주겠다 일생이 온통 너였던 측백나무 그 별 *시집, 눈과 도끼, 천년의시작 향하여 - 정병근 내 몸과 말이 어디론가 향하는 것은 그곳에 네가 있..

한줄 詩 2020.05.18

비문증의 날 - 윤의섭

비문증의 날 - 윤의섭 모기가 아니라 문자가 날아다닌다고 풀이해 보면 이 증상의 덕목은 해독 불가능한 무정형에 있다 동공에 둥지를 튼 새들 홍채의 숲까지 날아가서는 잡히지 않는 암호가 되기도 하는 투명한 물속에 가라앉다 번지는 잉크이거나 산허리에서 흩어져 간 구름 아니 날개를 펼친 나비이거나 흐릿한 얼굴이거나 망막의 수평선으로 떨어지는 달을 바라본다 떠오르지 않는 기억 속에서 나는 여전히 소원을 빌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다만 주어가 불투명한 비문(非文)이었으므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일이 계속 이루어졌다 나는 눈이라는 행성에 누군가를 두고 온 것이다 유리체의 곡면을 타고 나비는 대륙을 횡단하는 중이다 나비였는가 나비는 왜 잠들지 않는가 동공에 떠다니는 점문은 왜 꿈속에서만 읽을 수 있는가 눈물인지 핏..

한줄 詩 2020.05.17

자벌레의 시간 - 안태현

자벌레의 시간 - 안태현 나는 여전히 숲을 통과하는 중이다 아침부터 오후까지 불타는 연두 속에 갇혀 있다 나무들이 술렁거릴 때마다 멀미가 일어서 마지막에 닿을 겨울 항구를 떠올리게 된다 숲은 자신의 세계를 완성하려는 의지로 충만하다 부러지고 쓰러지는 고통을 무한하게 허용하는 세계 끌어안아야 하는 가슴들이 너무 많아서 바람 부는 밤엔 그림자들이 유령처럼 떠다니며 울어댄다 갈 곳을 찾아 헤맨다 아무것도 모의 한 바 없는 내 생도 거기에 있어서 나는 숲의 이면을 들추고 드나드는 모든 흔적을 일일이 기록하려는 근시처럼 기어서 기어이 간다 느리지만 빛나는 태도로 목이 달아난 꽃들을 줍기도 하면서 데인 듯이 한 시절을 지나간다 *시집, 저녁 무렵에 모자 달래기, 시로여는세상 어느 날 갈피 - 안태현 골목이 잘 녹아..

한줄 詩 2020.05.16

십 년 뒤에 만날 사람 - 이승주

십 년 뒤에 만날 사람 - 이승주 십 년 뒤에 만날 사람 있다 낮에는 앞산 보면 되고 날 저물어 산 볼 수 없는 캄캄한 밤엔 그 사람 생각 생애 단 한 번의 순간을 호명하지 못하고 꽃을 지난 다디단 단내의 그리움으로 맞이해야 할 밤들 그 사람으로 인해 고쳐질 그 사람으로 인해 깊어진 병 그 사람을 떠올렸다 함께 떠오른 생각 그 사람을 잊었다 함께 잊어버린 생각 지금, 그 시간을 다 찾을 순 없어도 열일곱 여학생보다 마흔이 더 아름다운 그 사람 십 년 뒤에 만날 사람 있다 *시집, 물의 식도, 천년의시작 슬픔에 대하여 좀 아는 그 - 이승주 슬픔에 대하여 좀 아는 사람들은 기쁨에 대하여 좀 안다고 말하는 사람들보다 눈우물이 더 깊다 슬픔에 대하여 좀 아는 그는 나는 슬픔에 대하여 좀 안다고 말하진 않지만 ..

한줄 詩 2020.05.11

윤슬에 출렁이다 - 박경희

윤슬에 출렁이다 - 박경희 툇마루에 앉아 산 아래를 내려다본다 간간이 못 물결로 우는 소쩍새와 대나무 숲에서 휘청이는 파랑새 떨림이 내 안에 든다 뭉텅이로 앞산을 지나가는 산 그림자 참나무 숲도 무르팍 같은 큰 바위를 쓸고 간다 채반 가득 고사리 말라가고 늘어지게 하품하며 늙어가는 개밥 그릇에 박새가 여러번 왔다 간다 그런데 둘러봐도 사람이 없다 흙 묻은 고무신 한 켤레 댓돌 위에 앉아 있을 뿐, 다람쥐 자갈 밟는 소리에 넘어지는 햇살만 있을 뿐 어느 날 나는 사람이 아니다 *시집, 그늘을 걷어내던 사람, 창비 폐염전 - 박경희 눈꺼풀 내려앉은 눈을 비비다가 숟가락이 밥을 놓쳤다 산고랑 볕 짧게 드는 곳에서나 문고리에 걸어둘 법한 휘어진 숟가락 한사코 제대로 넣어보겠다고 이 없는 굴로 퍼 나른다 퉁퉁마다..

한줄 詩 2020.05.11

거리에서의 단상 - 백성민

거리에서의 단상 - 백성민 절룩거리며 걷는 것만으로도 세상에 남은 마지막 희망이라고 반 무릎씩 접히는 어깨의 무너짐으로 골목길을 돌아 멈춘 자리 재활용 봉투의 깔끔함 옆으로 빈 소주병 두 개가 나뒹군다. 고운 여인의 목선 같은 병목안의 온도는 몇 도일까? 뜨거움이 빠져나간 자리 아무리 토악질을 해도 게워낼 없는 어지럼증이 허기를 일으켜 세운다. 생목을 앓듯 넘어가는 하루 은밀함을 감춘 불빛들이 촉각을 세우고 영역 밖으로 밀려난 발걸음은 저문 길을 따라 걷는다. 무릎마다 채워지는 바람 소리 얼마나 더 걸어야 나는 한 칸 반 어둠을 등에 질 수 있는가. *시집/ 너의 고통이 나의 고통인 것처럼/ 문학의전당 이 지상 어디쯤 - 백성민 하늘빛 그리움 먼저 풀어내고 햇살 한 줌에 올올이 영근 빛을 담아내는 웃음 ..

한줄 詩 2020.05.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