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마지막에 대하여 - 이정훈

마루안 2020. 5. 8. 19:22



마지막에 대하여 - 이정훈



마지막, 소리 내면

지금도 목울대에 등자 같은 게 솟아오른다

아버지만 해도 그렇지,

건빵 한봉지가 다였다니

나는 밤나무 꼭대기의 저녁 햇살이

성 엘모의 불이었다고 기억한다

폭풍 속 배의 마스트에 환했다던 그 불덩이

아버지는 건빵 한봉지를 쥐여주고

마당 속으로 가라앉은 거다

마지막이란 말은 그러고 보니,란 말 뒤

안장에 매달린 건빵 자루처럼 덜렁거린다

건빵을 하나씩 꺼내 먹으며

막막한 마당 밖으로 밀려가는 중이다

단단하고 물기라곤 하나 없는 막

막의 한 끝을 혀로 녹여

수프처럼 물렁하게 만드는 게 여정의 끝

마지막은 넓고 황량해

줄 게 건빵뿐인 이가 처음도 마지막도 아니겠지

그러나 얼마나 멋지냐

산맥을 타넘어도, 들판을 가로질러도 좋고

키클롭스와 세이렌의 바다를 떠돌아도 좋고

좋은 것을 찾아 더 멀리 헤매는 사람의 운명

마지막,

말하고 나면 금방이라도

힘센 말이 나를 싣고 떠날 것 같은 기분이 드는 이유다



*시집, <쏘가리, 호랑이>, 창비








쏘가리, 호랑이 - 이정훈



나는 가끔 생각한다

범들이 강물 속에 살고 있는 거라고

범이 되고 싶었던 큰아버지는

얼룩얼룩한 가죽에 쇠촉 자국만 남아

집으로 돌아오진 못하고 병창 아래 엎드려 있는 거라고

할애비는 밤마다 마당귀를 단단히 여몄다 아버지는

굴속 같은 고라댕이가 싫어 산등성으로 쏘다니다/

손가락만 하나씩 잘라먹고 날 뱉어냈다

우두둑,  소리에 앞 병창 귀퉁이가 와지끈 무너져 내렸고

손가락 세개를 깨물어 먹고서야 집으로 돌아갔다

아버지가 밟고 다니던 병창 아래서 작살을 간다

바위너덜마다 사슴떼가 몰려나와 청태(靑苔)를 뜯고

멧돼지, 곰이 덜컥덜컥 나뭇등걸 파헤치는 소리

내가 작살을 움켜쥐어 물속 산맥을 타넘으면

덩굴무늬 우수리범이

가장 연한 물살을 꼬리에 말아 따라오고

들판을 걸어가면 구름무늬 조선표범이

가장 깊은 바람을 부레에 감춰 끝없이 달려가고

수염이 났었을라나 큰아버지는,

덤불에서 장과를 주워먹고 동굴 속 낙엽 잠이 들 때마다

내 송곳니는 점점 날카로워지고

짐승이 피를 몸에 바를 때마다

하루하루 집을 잊고 아버지를 잊었다

벼락에 부러진 거대한 사스래나무 아래

저 물 밖 인간의 나라를 파묻어 버렸을 때

별과 별 사이 가득한 이끼가 내 눈의 흰창을 지우고

등줄기 가득 가시가 돋아났다

심장이 둘로 갈라져 아가미 양쪽에서, 퍼덕,

거,리,기,시,작,했,다

산과 산 사이

소(沼)와 여울, 여울과 소가 끊일 듯 끊일 듯 흘러간다

좌향(坐向) 한번 틀지 않고 수십대를 버티는 일가붙이들

지붕과 지붕이 툭툭 불거진 저 산 줄기줄기

큰아버지가 살고 할애비가 살고

해 지는 병창 바위처마에 걸터앉으면

언제나 아버지의 없는 손가락, 나는 






# 이 시를 읽으면서 진짜가 나타났다고 생각했다. 예능 프로의 이름이지만 이 시인을 칭하는데 딱이다. 좋은 시에는 이런저런 감상 글도 사족이 될 수 있다. 닥치고 읽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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