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정선 가는 길 - 이우근

마루안 2020. 5. 9. 19:10



정선 가는 길 - 이우근



정선이라는 강호(江湖)에서 나의 무협적 필살기는 게으름이었다
그 게으름에 조금 바빴다
손가락 까닥 않고 증오를 종식시킬 수 있는
자유자재의 능력배양의 끝없는 수업
침묵이 주식, 호흡은 간식, 배설에는 냄새가 없었다


정선의 밤은 맑고 투명했다
이마를 쪼갤 듯 노려보는 별빛과
문득 지나가며 찐빵보다 큰 불빛을 발사하는 반딧불이는
씹어도 먹어도 바닥을 드러내지 않는
화수분의 영양식이었다
배가 고픈 게 좋았다
정선의 강물은
껌 좀 씹었던 아이처럼 톡, 톡,
그렇지만 결코 성급하게 나아가는 법이 없었다
읍사무소 앞뜰 감꽃이 시간을 인식하고 스스로 떨어지듯
언젠가 떠나리라 기다릴 줄 안다


정선에서는 막 헤프고 싶었다
공기를 마시는, 흐르는 물에 발 담그는,
새털구름과 바람을 희롱하는,
사람을 그리워하는 죄를 지은 세금을 무책임하게 납부하고 싶었다
정선에는 맑고 깊은 것이 가져다주는 시간의 선물이 많았다
나는 그것을 몰랐다


그래서 정선에는 기다리는 사람이 많다
내가 기다리는 마지막 버스는 오지 않는다.



*시집, 개떡 같아도 찰떡처럼, 도서출판 선








장릉에서 - 이우근



엄흥도는 생각했다
스스로의 불신검문이 가장 어렵고
가장 사소하나 가장 의로운 일은 들의 풀꽃처럼
지천에 늘려 있어, 선택하지 않으면 시간은 비켜가리라
하지만 그럴 수가 없어 짚신을 끌며 지게를 메고
자못 비장하지만 비루한 본성은 감출 수가 없었다
껍질을 벗고 나면 반상도 남루인 걸
주검에 꽃필 일이야 없겠지만 어린 생애는 그래도
빛을 잃지 않고 꿈길을 기웃거리다
내 곁으로 왔다
이것이 왜 나의 운명인가,
그의 어린 아내의 초조한 눈빛이 더욱 사무친다
아픈 것은 어찌 됐건 급한 대로 닦아주고 여며 주면
마음이야 편할 것이다
몸속의 피가 묽어지도록 비를 맞으며
개울을 건너는 것은, 취모금 위로 맨발로 걷는 듯
불의한 사람의 강을 건너는 마음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길에 동행하는 심정은
낯설고 황망하다 그러나 일말의 동정이 아니라
물려받은 유산이 대책없이 착함이라
이만큼 살아온 것에 대한 보답으로 작은 역사를 세우는 것도
별로 손해되는 일은 아니리라
어린 손의 한기는 그 생애만큼 차갑고
본성에 가까운 그리움에 지친 저 감은 눈은
이미 많은 것을 가리키고 있다
새벽이 오기 전에 저 어린 나랏님은 다른 세상의 문을 열리라
많은 이별에 지쳐 떠나는 길도 더디기만 할 것인즉
오히려 남은 사람의 슬픔의 몫이 더욱 비참하다
그것을 나는 아무도 몰래 가슴에다 묻는다,
나같은 아랫것에겐 변절도 사치, 애초에 그 뜻도 몰랐다
엄흥도는 그렇게 생각했다.



*단종의 무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