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3890

눈물 한 끼 - 이서화

눈물 한 끼 - 이서화 봉분 가득한 씀바귀 줄기에서 낯익은 머리카락 냄새가 난다고 바람이 쓴맛을 키우며 아는 체를 한다 맨 마지막에 챙겨 간 늦가을의 기억 잊지 않으려 엄마는 해마다 씀바귀 김치를 마련한다 이파리마다 꽃 진 자리마다 아직 할 말이 남았다는 듯 뽀얀 젖줄을 쟁여두었다 봄바람을 보태 손으로 뽑으면 쉽게 뽑히는 엄마 잔소리 같은 씀바귀 몇몇이 둘러앉아 금방 버무린 씀바귀 김치를 먹는다 뱉지도 삼키지도 못할 쓴맛에 목이 메면서도 몸에 좋다고 말대답하듯 설탕을 뿌리고 식초를 붓는다 참, 맛있다 참, 맛있다 말은 엄마에게서 처음 들었을 것이다 잘 삭은 울음은 형체가 없다 나름 세상의 쓴맛 단맛 다 보았다 생각했는데 왜 엄마라는 말은 눈으로 간을 보는 것인지 왜 짭짤한 눈물 맛을 입안 가득 맛보는 것..

한줄 詩 2020.05.25

마침내 바보들이 돌아왔다 - 이원규

마침내 바보들이 돌아왔다 - 이원규 -고 노무현 대통령 추모시 한 사람이 떠났다 보내야 했다 한 사내가 떠났다 보내야만 했다 한 바보가 떠났다 보낼 수밖에 없었다 이른 아침까지 저승새 울더니 한 시대의 풍운아, 한반도의 고독한 승부사 잠시 눈길 피하는 사이 몸을 날렸다 절망과 환멸의 짙은 그늘 아래 쪼그려 앉아 잠시 고개를 숙이는 사이 역주행 한반도의 먹구름 속에서 발만 동동 구르며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는 사이 한 사나이가 먼저 온몸을 날렸다 살아남은 우리 뒤통수에 벼락을 내리치며 저 홀로 훌쩍 뛰어내리고야 말았으니 부엉이바위는 절명의 성지 이 시대의 처음인 생사일여 순교지가 되었다 그리하여 한 사람이 떠나고 또 하나의 바보가 돌아오고 있다 비운의 풍운아, 고독한 승부사가 떠나고 마침내 수백 수천만 명..

한줄 詩 2020.05.23

낙동강 성형일지 - 김요아킴

낙동강 성형일지 - 김요아킴 -금곡동 아파트 시술은 계속되었다 미끈한 종아리와 일자로 뻗은 각선미를 위해 포크레인 굉음과 함께 덤프트럭들이 진을 쳤다 매일 아파트 베란다로 보여지는 메스질은 갈수록 날카로웠다 옆구리로 밀린 곡선의 살들이 선을 잰 듯 잘려나가고 반듯한 이목구비를 위해 더욱더 뼈를 파내었다 환자의 부작용에 대한 사전공지는 없었다 아름다움에 도취된 기세는 수없는 광고와 자본으로 덧칠을 하며 본래의 유전자를 망각해갔다 중독은 스스로 이겨내지 못할 한계치에서 몸살을 앓았고, 곪아갔다 물음표들이 부표처럼 떠다녔다 ​ *시집/ 공중부양사/ 애지 공중부양사 - 김요아킴 -금곡동 아파트 토요일, 제법 푹신한 침대는 지난 주 노동의 보상으로 달콤하다 못해 살짝 볼륨을 높인 브라운관의 환청 속으로 무언가 검..

한줄 詩 2020.05.22

저녁 목소리 - 조성국

저녁 목소리 - 조성국 고매(古梅)향 걸터앉은 툇마루 호듯호듯 끓는 볕살이 좋다 치자 빗밑이 무거운 연둣빛 파초 잎 빗방울 긋는 소리도 좋고, 누렇게 욱은 솔이파리 가만 뒤흔드는 오랍들의 바람 소리도 좋다 치자 한껏 달빛 내비치는 대밭 나직이 서걱대는 이파리 소리도 좋고 갓밝이 무렵이나 어슬막 고샅 탱자울에서 재갈재갈거리는 오목눈이 참새 소리도 좋다 치자 제아무리 좋다 쳐도 풀어놓은 닭들을 구구구 불러 모아 먹이를 주는, 주린 집개가 허천뱅이별을 바라보며 눈동자 빛내는 그맘때를 훌쩍 뛰어넘어 실컷 놀던 나한테 하얗게 새하얗게 밥 짓는 연기 나지막이 펴져 오듯 밥 먹으라, 데리러 오는 저녁 목소리가 나는 이 세상에서 제일 좋았다 *시집/ 나만 멀쩡해서 미안해/ 문학수첩 봄밤 - 조성국 대뜸 찾아와서는 승속..

한줄 詩 2020.05.21

봄날은 간다 - 최성수

봄날은 간다 - 최성수 잘 있거라, 눈부신 새잎의 시간이여 숲 아래서 더 깊어지는 그늘의 자리여 오래 춥고 잠시 따사로웠던 짧은 시절은 이렇게 잠들고 말리니 냉이꽃대 단단하게 힘 오르고 잡초들 더 굳세게 땅바닥 움켜쥐고 견디는 땡볕의 시간이 저기 다가온다 피어서 사랑스럽지 않은 꽃이 어디 있으랴 봄날에 빛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으랴 나 또한 그렇게 사랑스럽고 빛났으니 이제는 툭툭 자리를 털고 떠나야 할 때 그러니, 잘 있으라 덧없고 쓸쓸한 시절 또한 잘 있으라 꽃은 지고, 바람은 불고, 이렇게 봄날은 간다 *시집/ 물골, 그 집/ 도서출판 b 물골*. 그 집 - 최성수 종일 아무도 오지 않을 것 같은 물골 그 집에 앵두꽃 피었다 문은 잠겨 있고 저 혼자 봄바람에 팔랑거리는 현수막 '감자전 한 접시 (3..

한줄 詩 2020.05.21

나도 한때는 요즘 애들이었다 - 권혁소

나도 한때는 요즘 애들이었다 - 권혁소 권 선생, 잊지 말게 그대도 한때 교복 단추 한두 개쯤 풀어놓고 검은 운동화 꺾어 신던 요즘 애들이었네 교납금 미납으로 학교에서 쫓겨나 울 엄마가 가난하지 내가 가난해, 씨발 까닭 모를 질문 세상에 게워내던 빡빡머리였다는 사실, 잊지 말게 그대도 한때는 무서운 요즘 애들이었네 잊지 말게, 요즘 애들이 커서 끝내는 광장이 된다는 사실 나라가 된다는 진실 *시집/ 우리가 너무 가엾다/ 삶창 중학교 선생 - 권혁소 백창우의 동요 '내 자지'를 너무 무겁게 가르쳤다고 학부모들에게 고발당했다 늙어서까지 젖을 빠는 건 사내들이 유일하다고 떠도는 진실을 우습게 희롱했다가 여교사들에게 고발당했다 아파트 계단에서 담배 피고 오줌 쌌다는 주민 신고 받고 홧김에 장구채 휘둘렀다가 애한..

한줄 詩 2020.05.21

세상에서 울음이 가장 슬픈 새 - 이봉환

세상에서 울음이 가장 슬픈 새 - 이봉환 한참을, 뒷산이 내 뒤에 배경처럼 앉아 있었고 또 한참을, 멧비둘기 한 마리 날아와 곁이 되어 있었다 무슨 일이 있어서 나른한 봄 여기까지 내려왔니? 왜 자꾸 동구 밖을 기웃거려? 구국구욱 구국국 구욱국 내가 묻고 그가 답하는데 밤새 끙끙 앓던 처가 오늘 새벽 숨을 놓아버렸어 앞산 사는 장모님이 연락받고 오신다기에, 흑흑 아내가 죽었어? 저런, 저런, 애들은 몇이나 되고? 아들 둘에 딸 하나, 가쁜 숨을 몰아쉬며 아내가 그랬어 자기 죽거들랑 새끼들은 꼭 장모님한테 맡겨달라고 그래야 안 굶기고 옷 제대로 입혀 키울 수 있다고 짠한 새끼들 시골 할머니한테 떠맡기는 건 싫지만 뱁새 집에 알 낳고 몰래 도망쳐버린 뒷산 뻐꾸기보다는 낫다고 그래, 그래, 힘내서 잘 살아라 ..

한줄 詩 2020.05.20

몰래 버린 신앙 - 김광섭

몰래 버린 신앙 - 김광섭 양파를 벗길 때 핏줄은 선명해져 봐, 음침한 뿌리 불투명한 일가 돌이킬 수 있단다 돌이켜야지 핏줄은 끊는 것 붉은 망 속의 해골을 확인해도 잊히지 않는 분열된 뚜렷한 혈통 아버지, 몰래 버린 신앙 너는 나를 업신여기는구나 날 잃은 상주여 *시집/ 내일이 있어 우리는 슬프다/ 파란출판 파문 - 김광섭 자유롭고 울창한 그늘을 향해 모든 열매가 상상하는 한 그루 생명이 자란다 빛과 어둠이 서로 깨물며 하나의 목덜미가 되는 삽입의 물결 자기 자신으로부터 구원받고 싶다는 말을 듣고 싶은 인간은 계속 깨어나겠지만 당분간 믿음은 눈부시지 않기 위해 애쓸 것이다 내가 나를 부끄럽다 하는가 알몸처럼 떠오르는 물음 고독한 둘레 나의 사려 깊은 불신은 온순하다 양들은 길을 잃고 태도를 얻는다 인간..

한줄 詩 2020.05.19

외로운 별은 너의 것이 아니다 - 김종해

외로운 별은 너의 것이 아니다 - 김종해 떨어지는 잎을 보며 슬퍼하지 마라 외로운 별 그 안에 와서 사람들마저 잠시 머물다 돌아가지 않더냐 봄 여름 가을 겨울 어느 것이든 사라져 가는 것을 탓하지 마라 아침이 오고 저녁 또한 사라져 가더라도 흘러가는 냇물에게 그러하듯 기꺼이 전별하라 잠시 머물다 돌아가는 사람들 네 마음속에 영원을 네 것인 양 붙들지 마라 사람 사는 곳의 아침이면 아침 저녁이면 저녁 그 빈 허공의 시간 속에서 잠시 안식하라 찰나 속에서 서로 사랑하라 외로운 별은 너의 것이 아니다 반짝 빛나는 그 허공의 시간을 네 것인 사랑으로 채우다 가라 *시집/ 늦저녁의 버스킹/ 문학세계사 떠남에 대하여 - 김종해 사람은 누구나 태어나는 순간부터 한 개의 해와 한 개의 달을 무상으로 배당받는다 살아가면..

한줄 詩 2020.05.19

눈물의 씨앗 - 황형철

눈물의 씨앗 - 황형철 앉으려면 힘없이 쓰러지고 빙글빙글 원을 그렸다 그래 지구는 둥그니까 어떤 축이 있어 하루 한 번씩 회전하는 거라고 배웠으니까 돌고 도는 게 인생이라고 늦게나마 깨달았으니까 어지럽다는 것은 눈물이 많다는 증거 태생적으로 둥글기만 하여 구를 수밖에 없는 성질이어서 자꾸만 원심력이 몸 안을 도는 것이어서 일종의 소용돌이고 자전이고 순리다 도처에 우왕자왕, 눈물이 범람할 징조다 누군가의 눈물을 닦아준다는 것은 어지럼증 덜어 몸을 일으키고 어둔 구름의 한쪽을 걷어 사막에서 잃은 별자리를 되돌려주는 것일 텐데 잘못 받아든 점괘처럼 안절부절 못하고 정처 없이 길을 떠나는 것도 실은 눈물이 구르는 힘 눈물을 가지고 살아가는 자의 숙명 *시집/ 사이도 좋게 딱/ 걷는사람 바위무덤 - 황형철 하루하..

한줄 詩 2020.05.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