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잠의 맛 - 이서화

마루안 2020. 4. 29. 22:00



잠의 맛 - 이서화



봄날, 양지쪽에 앉은 노인이 햇살을 주무르고 있다


늙은 개도 어린 개도 천방지축이고 뾰족뾰족 울음에 가시가 돋는 고양이도 입맛 다시는 하품 끝, 한껏 입 벌리고 잠의 맛을 보는 중, 저의 목 떨어지는 줄 모르는 선운사 동백도 짠물 민물 넘나드는 물 닮은 미끄러운 풍천장어도 봄 한철을 북적거리는데


하품 한 번 하는 사이 화르르 쏟아지거나

눈물 찔끔 눈가에 묻히는 그사이


이 무료하고 밍밍한 잠의 맛으로 가장 다디단 그 맛으로 잠은 따뜻한 허방처럼 활짝 열려 있다 그러니 아무리 손으로 주물러 확인해도 그 잠 떨치기 힘든 일이니 죽고 사는 일들의 딱 중간에 방심이 있으니 봄은 뭉쳐지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뭉쳐진 몽우리들이 서둘러 피고

하품 한 번 하고 툭 떨어진다

그사이 뾰족한 계절이 지나고

남아있는 잠들이 입을 한껏 벌리고 봄을 빠져나간다



*시집, 낮달이 허락도 없이, 천년의시작








봄을 전지하다 - 이서화



몇백 평의 봄을 빌려 복숭아를 따려 했던 아버지

햇살 묻은 손으로 더듬고 꽃을 따고 봉지를 씌웠으나

연이어 이 년 동안 봄꽃만 보았을 뿐

열매는 설익어 떨어지고 말았다

올해도 전지를 하신다

가지들, 순록의 뿔처럼 밭가에 쌓여 있다

까끌까끌한 아버지의 심사는 그것들을 잘 묶지 못했다

쌓아놓은 저 뿔 같은 나뭇단은 보약처럼

하루 저녁 곤한 등을 지지기에 알맞을 것이다


목질 된 봄날이 꽃 피었던 가지를 잘라

아버지의 눅눅한 방을 덥힌다

봄꽃 같은 불, 때로는 꽃눈 터지는 소리가

천둥의 울림으로 아궁이를 빠져나온다

불꽃 춤사위 출렁거리는 봄날 매운 연기

그 힘으로 끌어올리는 재의 온도가 끈질기다


꽃의 기운으로 하룻밤 잔 것이 웬 호사냐고 아버지 온몸에

물이 오른다

가지가 잘려도 봄은 다 이해를 하는구나

엊그제 세상을 떠난 동네 어르신

울고불고하던 자식들도 한결 평온해진 봄

전지한 가지마다 쓰린 꽃이 필 것이다


올해는 꽃이 아닌

수밀도가 그날의 환청처럼 자랄 것이다






# 이서화 시인은 강원도 영월 출생으로 상지영서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2008년 계간 <시로여는세상>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굴절을 읽다>, <낮달이 허락도 없이>가 있다. 현재 계간 시로여는세상 편집장과 강원작가회의 사무국장을 맡고 있다. 2019년 아르코창작지원금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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