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무연고 대기실 - 전윤호

마루안 2020. 5. 3. 22:00



무연고 대기실 - 전윤호



의사는 흰 보를 씌우고

번호가 달린 서랍에 밀어 넣었다

나는 제대로 죽었다


다른 시신이 들이닥친다

산다는 건 이별을 통보받고

죽는 순서를 기다리는 것


연고자 없이 냉동고에 눕는 밤

소독약 냄새 가득한 취객들 속에서

소주잔에 성에가 낀다


인수하러 오지 않는 너

나는 실습용으로 기증될 것이다

이번 생은 이렇게 끝난다



*시집, 세상의 모든 연애, 파란출판








공주탕 - 전윤호



배를 타고 건너야 저승이 아니더라

치정으로 행복해지려 한 죄

폭포를 오르고 종소리를 견뎌도

벗겨지지 않더라 벌만 늘더라

내 몸을 휘감은 연인이여

영원한 건 없더라 이별 앞에서

마음 따윈 순식간에 벼랑이더라

이제 이곳에서 몸을 씻고

서로 다른 세상으로 떠나지만

만남은 한 번으로 족하리니

깊은 사랑은 구렁이처럼 길고

슬픔은 비늘로 반짝이더라

배를 타고 건너야 저승이 아니더라

인연 한 번에 목숨 하나

청평사 바닥없는 굴 앞에

누군가 벗고 간 허물들만 가득하더라






# 언제부터였을까. 참 오랜 기간 전윤호 시를 읽었다. 그도 중년에 접어들면서 시가 많이 간결해졌다. 군더더기가 줄면서 울림은 훨씬 크다. 그의 특징이기도 하거니와 여전히 위트 있는 문구가 정곡을 찌른다. 아무리 시인들이 지 잘난 맛에 산다지만 독자에게 이런 친철을 베풀 때도 있어야 하는 것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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