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연고 대기실 - 전윤호
의사는 흰 보를 씌우고
번호가 달린 서랍에 밀어 넣었다
나는 제대로 죽었다
다른 시신이 들이닥친다
산다는 건 이별을 통보받고
죽는 순서를 기다리는 것
연고자 없이 냉동고에 눕는 밤
소독약 냄새 가득한 취객들 속에서
소주잔에 성에가 낀다
인수하러 오지 않는 너
나는 실습용으로 기증될 것이다
이번 생은 이렇게 끝난다
*시집, 세상의 모든 연애, 파란출판
공주탕 - 전윤호
배를 타고 건너야 저승이 아니더라
치정으로 행복해지려 한 죄
폭포를 오르고 종소리를 견뎌도
벗겨지지 않더라 벌만 늘더라
내 몸을 휘감은 연인이여
영원한 건 없더라 이별 앞에서
마음 따윈 순식간에 벼랑이더라
이제 이곳에서 몸을 씻고
서로 다른 세상으로 떠나지만
만남은 한 번으로 족하리니
깊은 사랑은 구렁이처럼 길고
슬픔은 비늘로 반짝이더라
배를 타고 건너야 저승이 아니더라
인연 한 번에 목숨 하나
청평사 바닥없는 굴 앞에
누군가 벗고 간 허물들만 가득하더라
# 언제부터였을까. 참 오랜 기간 전윤호 시를 읽었다. 그도 중년에 접어들면서 시가 많이 간결해졌다. 군더더기가 줄면서 울림은 훨씬 크다. 그의 특징이기도 하거니와 여전히 위트 있는 문구가 정곡을 찌른다. 아무리 시인들이 지 잘난 맛에 산다지만 독자에게 이런 친철을 베풀 때도 있어야 하는 것 아니겠는가.
'한줄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오월의 편지 - 나호열 (0) | 2020.05.07 |
---|---|
굳은살 - 한관식 (0) | 2020.05.06 |
나뭇가지의 질문법 - 박남희 (0) | 2020.05.02 |
상처 - 김성장 (0) | 2020.04.30 |
잠의 맛 - 이서화 (0) | 2020.04.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