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나뭇잎 흔들릴 때 피어나는 빛으로 - 손택수

마루안 2020. 5. 7. 22:57



나뭇잎 흔들릴 때 피어나는 빛으로 - 손택수



어디라도 좀 다녀와야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을 때

나무 그늘 흔들리는 걸 보겠네

병가라도 내고 싶지만 아플 틈이 어딨나

서둘러 약국을 찾고 병원을 들락거리며

병을 앓는 것도 이제는 결단이 필요한 일이 되어버렸을 때

오다가다 안면을 트고 지낸 은목서라도 있어

그 그늘이 어떻게 흔들리는가를 보겠네

마흔 몇 해 동안 나무 그늘 흔들리는 데 마음 준 적이 없다는 건

누군가의 눈망울을 들여다 본 적이 없다는 얘기처럼 쓸쓸한 이야기

어떤 사람은 얼굴도 이름도 다 지워졌는데 그 눈빛만은 기억나지

눈빛 하나로 한생을 함께하다 가지

나뭇잎 흔들릴 때마다 살아나는 빛이 그 눈빛만 같을 때

어디 먼 섬이라도 찾듯, 나는 지금 병가를 내고 있는 거라

여가 같은 병가를 쓰고 있는 거라

나무 그늘 이저리 흔들리는 데 넋을 놓겠네

병에게 정중히 병문안이라도 청하고 싶지만

무슨 인연으로 날 찾아왔나 찬찬히 살펴보고 싶지만

독감예방주사를 맞고 멀쩡하게 겨울이 지나갈 때



*시집. 붉은빛이 여전합니까. 창비








신록의 말 - 손택수



절경 앞에서 절망한다

뭐라 이를 수가 없다

마치 말을 익히기 전의 아기처럼

첫 모음과 자음을 궁리 중이다

궁리 중이기만 하다

가르치는 아이 하나는 왜 지각을 했느냐는 힐책에

주말 사이 온 도시가 신록으로 물들어버려서

길을 잃고 말았다고 했다

그때 나는 왜 그리 쉽게 야단을 쳤을까

맹랑한 봄의 새 독도법을 윽박질렀을까

따분한 건 나의 노래였나 보다

함부로 부른 노래 속에 잃어버린 풍경들이었나 보다

해마다 봄이면 몸져눕는 어머니처럼.

반백년 전의 산통을 되새김

되새김질 하며 돋아나는 저 신록 속에 저릿한

무엇인가 있구나 차라리 아기처럼

뭐라 말은 못해도 두 눈이 빛나는

아기처럼만 있었어도 좋았을 것을

잃어버린 절경이여

돌아가자 시무룩해진 봄에게로

뭐라 할 수 없는 신록의 말들에게로




'한줄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정선 가는 길 - 이우근  (0) 2020.05.09
마지막에 대하여 - 이정훈  (0) 2020.05.08
오월의 편지 - 나호열  (0) 2020.05.07
굳은살 - 한관식  (0) 2020.05.06
무연고 대기실 - 전윤호  (0) 2020.05.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