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숨바꼭질 - 김말화

마루안 2020. 4. 28. 19:33



숨바꼭질 - 김말화



말술을 들이킨 술래는
숫자도 세지 않은 채 거친 숨을 내뿜으며
숨은 식구들을 찾기 시작했다
쉬 붙잡혀야 할 엄마도
스스로 나와야 할 오빠도 꼭꼭 숨어버렸다


날이 갈수록 더욱 치밀해지는 술래
기둥이 휘청거리고
허리 꺾인 벽이 털썩 주저앉고
대청마루 아래 오빠가 대문으로 뛰어가고
그 사이 방에서 현관으로, 부엌으로, 뒤꼍으로
점령군처럼 밀려오는 술래를 피해
집은 새파랗게 질린다


도대체 이 숨바꼭질은 언제 끝이 나는 걸까
술래는 마지막 통로라 여긴 부엌
미닫이문까지 봉쇄해버렸다 나는
지하 벙커 같은 이불 속으로 불안을 숨겼지만
홱! 분노로 이글거리는
눈동자에 빨려들곤 했다


지금도
고래고래 아가릴 벌리고
세상의 평온한 집을 집어삼키는 아귀 같은
수많은 술래에 대해 생각해본다


머리카락 보일라 꼭꼭 숨어라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일라



*시집, 차차차 꽃잎들, 애지








간보기 - 김말화



육개장을 끓이며
간을 보다 이슬을 마신다
간보는 게 안주가 되어 한잔 술에 간 한번


아버지는 거나하게 취하면 나를
무릎에 앉히고 고복수의 짝사랑을 부르게 했다
난 가수가 되어 술자리마다 이끌려 다니면서
안주가 되는 노래라도 불렀지만
취기가 절정일 때면
엄마와 오빠 언니는 숨거나 도망쳤다


엄마가 달아난 부엌
아버지는 동태찌개를 끓이면서
술 한잔에 간을 보고, 또 한잔 마시고 간을 보았다
동태찌개처럼 얼큰해진 아버지는
상을 차려 당신의 사랑이라는 듯 먹이면서
막내만 곁에 있구나, 막내만 곁에 있구나
간이 들어간 눈을 더욱 붉혔다


간보는 일이
폭력 후에 스며드는 자괴감을 맛보는 일이란 걸
그때부터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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