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3890

낯선 사람 - 허형만

낯선 사람 - 허형만 거을을 볼 때마다 늙은 낯선 사람 하나 만난다. 한 생의 자드락길이 이마에 고여 있고 얇아진 혀를 두려워하는 입술이 파르르 떨리고 있는 초라하기 그지없는 낯선 늙은이 하나 나와는 다른 듯 다르지 않아 보이는 사람을 거울 속에서 만난다. *시집/ 바람칼/ 현대시학사 흐리다 - 허형만 눈이 흐리다. 눈이 흐리니 하늘도 흐리다. 너무 맑은 것만 골라보고 살아온 죄, 참으로 미안하다. 흐린 것도 맑은 것인 양 그리 살아온 죄, 참으로 부끄럽다. 눈이 흐리다. 눈이 흐리니 마음도 침침하다. 이제 흐린 것도 흐린 것대로 침침한 것은 침침한대로 잔말 없이 고개 숙이고 있는 듯 없는 듯 사는 날까지 죽어 살기로 하는 것이다. # 허형만 시인은 1945년 전남 순천 출생으로 중앙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한줄 詩 2020.05.29

옥탑, 꽃양귀비 - 이은규

옥탑, 꽃양귀비 - 이은규 세상 끝나는 날까지 가난한 자는 있다 성서 속 문장에 밑줄을 긋는 순간 흐르는 구름과 창살 사이 당신은 부끄러울까 일용할 양식 대신 사들고 온 꽃양귀비 모종에 대해 많이 파세요, 드물게 밝았던 목소리에 대해 누군가에게 가난은 명사가 아닌 동사 내일 더 사랑해라는 비문처럼 점점 나아질 거라는 믿음을 오래 믿는다 옥탑에서 구름의 투명을 흉내내기 꽃양귀비, 꽃의 말은 망각과 위안이라는데 한나절 현기증의 색에 눈이 멀면 잠시 잊는 것으로 다독일 수 있을까 창살 너머 구름으로 흐르는 가난은 죄가 아니다 죄다 죄가 아니다 죄다 부정할수록 또렷해지는 정답이 있고 우리는 일찍 높은 곳에 오른 사람들 하늘이 보이는 방에 누워 함께 읽은 소설 한 사람과 한 사람은 첫눈에 서로를 알아보잖아, 생계..

한줄 詩 2020.05.29

잊다와 잃다 사이 - 나호열

잊다와 잃다 사이 - 나호열 마땅히 있어야 하는 그곳에서 사라진 시계와 지갑 같은 것 청춘도 그리하여서 빈 자리에 남은 흠집과 얼룩에 서투른 덧칠은 잊어야 한다는 것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손에서 놓아버린 아쉬움이라고 하여도 새순으로 돋아오르는 잊어야지 그 말 문득 열일곱에서 스물두 살 그 사이의 내가 잃어버린 것인지 놓아버린 것인지 아슬했던 그 이름을 며칠째 떠올려보아도 가물거리는 것인데 왜 나는 쓸데없이 손때 묻은 눈물에 미안해하는가 낮달처럼 하염없이 *시집/ 안녕, 베이비 박스/ 시로여는세상 칼과 자(尺) - 나호열 -이순을 지나며 칼을 품고 살았네 남을 해칠 생각은 없었지만 잴 수도 없는 사람의 깊이를 질러보거나 쓸데없이 너비를 어림잡아 보기도 하였네 차고 이울어지는 것이 달의 이치인데 보름달만 달..

한줄 詩 2020.05.29

대포리 고물 장수 - 심응식

대포리 고물 장수 - 심응식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 노래 그치고 아! 아! 고~물 삽니다! 채팅하던 마누라 집나가서 홧김에 집어던진 컴퓨터 돌리고 돌리다 기절한 세탁기 밤낮 신음하는 카세트라디오 막장연애 끝에 팔베개한 텔레비전 고~물 파세여~! 잠시 그쳤다가 다시 박아도 안 박히는 사진기 뱃심 좆심 다 쓰고 바람 잔 선풍기 헛물켜다 따기 맞은 청소기 뜨물에 담근 놈처럼 미지근한 에어컨 고물 파세여 고물~! 서울 대구 부산 찍고 스텝 엉킨 다이얼 전화기 부랄 떨어져 죽은 시계 곧 죽어도 별 세 개라고 개폼 잡는 냉장고 쏘니도 삼성도 망가지면 고물 고~물 삽니다! 봉고차 고물차 화물칸 녹슨 구멍으로 떨어지는 확성기 고~물 하는 소리 한나절 전봇대그림자로 지나가는 논틀길 *시집/ 조지 다이어의 머리에 대한 연..

한줄 詩 2020.05.28

방 뺀 날 - 김형로

방 뺀 날 - 김형로 이천십팔 년 유월 이십 일 이층 방 뺀 날 문자를 보냈다 방은 생각보다 넓고 슬프도록 깊다고 답이 왔다 존재보다 부재가 더 큰 나이가 되었다고 고맙게 살자고, 고맙지 않은 게 어디 있더냐고 -뽑은 이는 돌려주세요 첫정이라 묻어주렵니다 안 됩니다! 의료폐기물의 반출은 불가합니다! 그렇구나, 내 육신도 지상의 방 뺄 때 그럴 것이므로 내 것은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었으므로 주신 이도 거두시는 이도 그 분이시므로 *시집/ 미륵을 묻다/ 신생 고맙지 - 김형로 아이구 내 눈 고맙지 이런 먼지도 볼 수 있는 내 눈 고마워 아이구 내 손도 고맙지 이런 것도 다 치울 수 있으니 나이 먹으면 다 그렇지 치매는 무슨 치매 아이구 이 정도로 기억하는 것도 고맙지 내 발도 고맙지 데려가고 데려오고 이 집..

한줄 詩 2020.05.28

어지러운 길 - 황규관

어지러운 길 - 황규관 우리가 가져야 할 것은 단 하나의 길이 아니다 골목길은 큰길과 함께 있고 큰길은 오솔길이 없으면 무너진다 그래서 한때는 큰길이 열리고 저물녘이 되면 슬그머니 뒷길이 밝아지는 것이다 오솔길을 가다가 눈부신 머리카락이 떠올라 자신도 모르게 소음 가득한 큰길로 다시 내딛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 세계는 여러 길이 아침저녁으로 수십 년의 간격을 두고 교차하고 나란히 가고 갈라지고 뒤로 갔다 옆으로 쓰러지다 뭉치고 풀어지다 끊어지다 이어진다 어느 날 해일이 되기도 한다 길은 이념이 아니라, 걸으면서 웃는 웃음이며 걷다가 빠지는 수렁이며 수렁에서 슬픔의 힘으로 바라보는 깊은 하늘이다 떠나지 않는 절망이다 길은, 그래서 꺼지지 않은 숨소리이고 발걸음을 생산하는 어둠이다 *시집/ 이번 차는 그냥 보..

한줄 詩 2020.05.28

작은 주름 하나에도 마음 깃들여 - 김윤배

작은 주름 하나에도 마음 깃들여 - 김윤배 몸과 마음이 서로 건너다보고 살아온 세월은 아름다웠는가 마음이 혀를 찬다 몸 속에 너무 많은 것들을 세우고 허물어 혹 몸이 만신창이의 모습으로 홀로 눈떠 있게 한 것은 아닌가 세우고 허물던 세월 또한 아름다워 몸 속에 세월이 드나들었거나 세월 속으로 몸이 드나들었던 것은 아닌가 세월이 아름답기로는 마음 또한 이와 같아 몸이 시드는 날에도 마음은 꽃술 밀어올려 향기에 취해 있던 것은 아닌가 이제 마음을 따라가지 못하는 몸은 마음이 움직여 간 길목이 서럽다 생각하면 몸이 안고 예까지 온 작은 주름 하나에도 마음 깃들여 마음은 몸보다 먼저 아프다 *시집/ 따뜻한 말 속에 욕망이 있다/ 문학과지성 봄날은 가고 - 김윤배 네가 나의 모든 이름들을 지우며 슬픈 이름 하나로..

한줄 詩 2020.05.27

꽃의 자세 - 김정수

꽃의 자세 - 김정수 속을 꺼내 널자 환멸이 올라왔다 주춤주춤 담장 밖 맴돌던 손이 구름 속을 헤집어 꽃의 모가지를 낚아챘다 갇혀 있던 물 번져 길에 방화범을 풀어놓았다 탐스러운 한기(寒氣)로 겨울을 버틴 덩굴장미가 와락, 노란 혀를 내밀었다 트럭이 개처럼 짖으며 달아났다 바람이 덜컹거리는 짐을 채소와 과일로 구분하곤 굴러떨어졌다 창백한 뺨이 속도의 기색을 살피고 사라지자 꽃병의 눈금이 달로 기울었다 새로운 종(種)으로 태어난 덩굴장미가 시간 속에 앉아 귀를 물들였다 익숙하지만 그대로인 꽃병이 꽃의 자세를 일으켜 세웠다 부끄러운 감정이 뒤에서 서성거렸다 물을 끌어당기는 것은 조금 진실을 닮았다 오랜된 말이 다 익었다 *시집/ 홀연, 선잠/ 천년의시작 환청 - 김정수 목발에 몸 기댄 늦봄 차가운 방이 방을..

한줄 詩 2020.05.27

시대와 불화한 자의 초상 - 정기복

시대와 불화한 자의 초상 - 정기복 내게 시집 크기의 음영이 짙은 초상 한 점 있다 아침 거른 분주한 출근길에도 서류 가방 챙기듯 들고 보고 다들 퇴근한 늦은 밤에도 이제야 내 시간이려니 느릿느릿 들여다보는 누렇게 퇴색되어 빛바랜 흑백의 표구 한 점 있다 흰 저고리 상투머리 굳게 다문 입 불거진 광대뼈에 타오르는 불온한 눈매 백년 세월도 아랑곳하지 않는 너른 이마에 봉분처럼 솟은 혹 시대와 불화한 자의 매서운 눈초리가 순응과 적응의 내 일상 저편에서 횡설수설 왁자지껄한 술집의 벽 위에서 줄곧 노려보는데.... 까막눈처럼 속이고 물끄러미 바라보는 사발통문 한 장 있다. *시집/ 나리꽃이 내게 이르기를/ 천년의시작 스라소니 - 정기복 천부적 싸움꾼이 있었다 앉은자리에서 대여섯 걸음 훌쩍 날아오른 박치기에는 ..

한줄 詩 2020.05.26

전생 - 박시하

전생 - 박시하 한 마리 버려진 개로서 교회당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한 적이 있다 빗줄기 사이에서 무언가 희게 펄럭인 걸 기억한다 발은 꺾였고 눈은 멀었는데 어찌 볼 수 있었을까 사실 나는 교회당 그늘에서 숨죽인 타락한 천사였다 이제는 무엇이었는지도 모를 것을 너무도 사랑하여 벌을 받았다 지상의 것 더럽고 추악했을 텐데 어찌 사랑했을까 개의 멀어버린 눈 속에 깃들어 푸르른 죄악 사랑했으니 인간으로 태어남이 마땅했을 것이다 *시집/ 무언가 주고 받은 느낌입니다/ 문학동네 저지대 - 박시하 비 오기 전에는 낮은 바람이 불어왔다 생을 가로지르며 슬픔을 무찌르는 로맨스를 믿은 적도 있다 어떤 감정도 목숨보다 절실하지는 않은데 사랑 던져야 할 것들이 많아서 높고 아름다운 것 빛에 눈이 멀기 전에 습기에 이끌려 내려..

한줄 詩 2020.05.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