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상처 - 김성장

마루안 2020. 4. 30. 19:01



상처 - 김성장



썰매 타다 송곳에 찢어진 손목의 상처도 그렇고
개한테 쫓기다 넘어진 무릎의 상처도 그렇고
아무는 데 오래 걸렸다
오늘 그 상처를 보다가
상처 주변의 살갗들이 상처의 색깔과 닮았음을 깨닫는다
처음 그 상처들은 상처를 메꾸고
주변의 살갗과 같아지려고 애썼을 것이다
피가 솟구치고
피의 주변에 몰려든 통곡들
헤쳐가야 하는 피의 계곡에서
상처없이 피를 빨며 통곡을 건너가는
무사들이 있었다
오십이 넘은 지금까지도 지우지 않고
상처를 남겨둔 뜨거운 입김
통곡이 멈추고 통증이 사라져도
계속 버티며 지워지지 않는 상처의 혓바닥
또는 뿌리
지금도 상처의 주변에는
송곳의 첨단이 지나간 빛을 움켜쥐고 놓지 않는 불길이 있다
상처의 흔적은 상처의 주변에 서성거린다
상처도 사랑이 있어 상처를 낳고 싶어 한다
세상이 상처투성이인 것은
상처가 맨살보다 훨씬 꽃에 가깝기 때문
녹슨 무기 사이를 헤집으며 상처끼리 서로 다시 찢으면서도
손목이 무릎을 비비고 있다


소매를 끌어내리며 상처를 덮는다



*시집, 눈물은 한때 우리가 바다에 살았다는 흔적, 걷는사람








인연 - 김성장



동백이 질 무렵
영산홍이 피어나고 있더군
동백이 피어나며
아직 피지 않는 영산홍을 사모한 것은 아니겠지
지금 나 이렇게 뜨거운데 당신 왜 모르시는가
그렇게 가슴 치며 피고 지는 건 아니겠지
떨어지는 동백꽃 보며
왜 좀 더 기다리지 못하셨나요
영산홍이 원망하지 않듯이

그저 동백은 동백으로 피었다 지고
연산은 그냥 연산으로 피었다 지는데

동백꽃 떨어지고 영산홍 필 무렵
급식소에서 교무실까지
꽃이 피고 지는 속도로 걷고 싶은
은유의
거리
​화단 옆을 지날 때마다 마음 어지러웠다

어긋한 우리의 인연






*시인의 말 - 김성장


언어의 호수에 발 담그고 싶었으나
나, 호숫가 맴돌며 회한의 물결에 손 씻곤 했네.
이 많은 망치들이 어디서 흘러온 것일까.
첫 시집을 내고 25년
나는 산문의 거리를 떠돌다
잠시 이마에 물을 적신다.
내가 쪼아댄 언어들은 어디에서
먼지구름으로 뭉치고 흩어지는가.
두들겨도 달아오르지 않는 언어를 붙잡고
이제 또 어느 계곡의 돌을 기다려야 한다.
입구도 출구도 없는 둥근 물체
스윽 발을 담그어 본다.
언어의 바깥에 존재하는 세계는 없으니까,
식지 않는 운문의 비밀에 닿을 때까지
딱 딱 딱 딱.




'한줄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무연고 대기실 - 전윤호  (0) 2020.05.03
나뭇가지의 질문법 - 박남희  (0) 2020.05.02
잠의 맛 - 이서화  (0) 2020.04.29
숨바꼭질 - 김말화  (0) 2020.04.28
액자, 동백꽃 - 이명우  (0) 2020.04.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