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줄 冊 425

친애하는 나의 집에게 - 하재영

잔잔하게 울림을 주는 좋은 책을 읽었다. 문장에 글쓴이의 모든 것이 들어 있다고는 할 수 없어도 어느 정도 정체성을 짐작할 수는 있다. 그럴 듯하게 인생을 꾸며낼 능력이 있는 작가들은 더할 것이다. 그걸 감안하고 읽어도 이 책은 감동적이다. 내가 집에 대한 생각이 유난히 애틋하기에 더 그랬을 것이다. 누가 지은 건지는 몰라도 집은 사는 것이 아니라 사는 곳이라는 소박한 문장을 좋아한다. 집을 편안한 보금자리로 여기는 것보다 시장 값어치로의 판단이 앞서는 시대이기에 이 책의 울림은 더욱 크다. 대구에서 나고 자란 작가 하재영은 어릴 적 집에 대한 추억으로 시작한다. 나도 어릴 적 살았던 집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지금도 집 도면을 뚝딱 그릴 수 있을 만큼 뚜렷하다. 마당 모퉁이에 장독대..

네줄 冊 2021.03.06

가난의 문법 - 소준철

나는 이런 류의 책을 좋아한다. 가난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 사람 이야기가 훗날의 내 모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쓸쓸하게 읽었다. 지난 삶을 돌아보면 절대 그럴 리 없다고 단정했던 일이 빗나간 적 여러 번 있었다. 그래서 나는 장애인을 볼 때도 어쩌다 삐끗하면 나도 저렇게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한다. 공연한 걱정이 아니라 누구든 미래를 알 수 없기에 늘 겸손하고 소박하게 살아야 한다는 다짐이다. 내가 새옹지마라는 사자성어를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먹고 싶은 것 다 먹고, 가고 싶은 곳 다 갈 정도로 경제적 여유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운 좋게 건강한 몸이고 가난 때문에 돈을 꾸러 다닐 정도는 아니다. 주식이나 부동산 등 재산 증식을 위한 투자를 해본 적도 없다. 미련하게 오직 월급 받아 적금 넣는..

네줄 冊 2021.02.28

아직 자라지 않은 아이가 많았다 - 정선희 시집

생각 같아서는 이 땅의 시집을 모두 읽고 싶다. 불가능한 일이지만 그 꿈은 여전하다. 어쩌다 걸려든 시집에서 가슴에 쏙 들어오는 시를 발견할 때 기쁨이란 겪어보지 않으면 그 묘한 희열을 모른다. 섹스할 때의 오르가슴은 그때뿐 곧 허무함이 밀려오지만 시집은 여운이 길다. 내가 이 맛에 시를 읽지라는 말이 나오게 하는 시집을 읽었다. 는 정선희 시인의 두 번째 시집이다. 다소 밋밋했던 첫 시집과 달리 이번 시집은 맛이 확실히 느껴진다. 한 사람의 시집인데도 읽는 맛이 이렇게 차이가 난다. 문학적인 비평이야 평론가들에게 맡기고 순전히 아마추어 생각이다. 첫 시집에 비해 쌉싸름한 맛을 느낀다. 요즘 출판사 상상인에서 몇 권의 좋은 시집을 발견한다. 내가 읽어 본 적이 없는 문예지도 발행하는 무명의 출판사지만 시..

네줄 冊 2021.02.26

나는 풍요로웠고, 지구는 달라졌다 - 호프 자런

좋은 책을 읽었다. 는 제목부터 의미심장하다. 이 제목 속에 많은 의미가 담겼다. 인류가 지구에 출현한 후 사냥을 하며 살다가 문명을 이루고 이제는 지구를 괴롭히는 존재가 되었다. 사람은 풍족함과 편리함을 누리고 있지만 지구는 그만큼 힘들어 하고 있다. 우선 빼 먹기는 곶감이 달다고 언제까지 화석 연료를 뽑아 쓸 것인가. 화석 연료는 40억 년이 넘는 지구 나이 동안 갖은 변화를 겪으며 조금씩 축적된 물질이다. 그것을 인간이 나타나 근 100년 만에 완전 뽕을 뽑듯이 흥청망청 쓰고 있다. 무한정으로 나오는 석유와 석탄이 아니다. 저자는 조목조목 인간이 누리는 편리함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변해버린 대기, 따뜻해진 날씨, 녹아내리는 빙하, 높아지는 수위, 가혹한 작별 인사로 이어지..

네줄 冊 2021.02.23

인간 없는 세상 - 앨런 와이즈먼

오래 전부터 읽고 싶은 책이었다. 미뤘다가 놓쳐버린 책이 한둘이 아니지만 이제야 읽었다. 코로나 때문에 일 끝나면 바로 집으로 오고 가능한 바깥 출입을 자제하고부터 책 읽는 시간이 늘었다. 코로나로 모든 일상이 엉망이 되면서 무기력해질 때가 있지만 그나마 책이 있어서 다행이다. 툭 하면 어디론가 떠나기 위해 배낭을 챙겼던 날들이 까마득하다. 죽자사자 간다면야 못할 것도 없지만서도 방역수칙이 먼저다. 처음엔 힘들었으나 차차 이런 일상에 적응이 된다. 술집 안 가고 여행 안 가는 일상이지만 심심할 틈은 없다. 철저하게 TV와 주전부리를 멀리 해야 책 읽기도 지속할 수 있다. 조금만 방심하면 운동 습관 무뎌지는 것처럼 게으름이 잽싸게 자릴 잡기 때문이다. 개정판으로 나온 은 책 표지부터 인상적이다. 빌딩이 빽..

네줄 冊 2021.02.22

잠 못 드는 밤 백석의 시를 생각하며 - 김상욱

스물이 훨씬 넘도록 내가 아는 시인은 교과서에서 배운 시인이 전부였다. 읽은 시라고는 윤동주와 한용운, 서정주의 시였다. 군대에서 만난 선배 덕에 시인의 영역이 넓어졌다. 그때 선배가 읽던 황동규, 오규원, 황지우 시집을 처음 접했다. 감동은 별로 없었다. 그냥 스스로 잘난 맛에 사는 시인들의 지적 허영심 정도로 읽었다. 그 선임과 나는 성격은 이질적이나 어딘가 맞는 구석이 있었던지 늘 보초도 같이 서면서 곧잘 어울렸다. 진중하지 못하고 팔랑개비처럼 가벼운 나에 비해 그는 가슴 속에 돌덩이 하나 담고 있는 듯 언제나 고뇌에 찬 모습이었다. 어쨌거나 그때 감염된 시 바이러스가 지금의 시 읽기에 도움이 된 것은 확실하다. 당시에는 귀신 씨나락 까먹는 이야기였던 시였지만 내 몸 어디쯤에 숙주로 남아 있다 훗날..

네줄 冊 2021.02.21

건너 간다 - 이인휘

읽을 책은 언젠가는 읽게 되는가. 드물지만 그렇다. 3년 전부터 읽겠다고 찜해뒀으나 차일피일 미루다 이제야 읽었다. 집콕을 해야만 했던 설날 연휴 덕분이다. 이번이 아니면 영영 기회가 없을 것 같아 맘 먹고 이인휘 소설을 연이어 읽었다. 소설을 잘 안 읽기에 이것도 드문 일이다. 워낙 파란만장한 날들을 제압하며 살아왔기 때문인가. 웬만한 이야기는 다 시시하다. 이인휘 소설 다섯 권을 호떡 포개듯 책상 모서리에 쌓아 놓고 보니 읽기 전부터 배가 불렀다. . . , , 그리고 얼마 전에 나온 신작 이다. 폐허를 보다는 경어체 소설이라 몇 페이지 읽다가 일찌감치 접었다. 나는 희안하게도 경어체 문장을 읽지 못한다. 참으며 읽는다 해도 머리에 들어오질 않는다. 이인휘 소설은 미사여구보다 치열하게 살아가는 사람들..

네줄 冊 2021.02.18

말랑말랑한 노동을 위하여 - 황세원

코로나 직격탄으로 소득이 준 사람이 여럿인 세상이다. 안 그래도 자기가 살고 있는 시대가 가장 불황이고 살기 어렵다고 하는데 정말 징글징글한 바이러스다. 그런 사람에 비하면 나는 비교적 선방이다. 소득이 약간 줄긴 했어도 돈 쓸 일이 줄어든 탓에 소득 감소를 못 느낀다. 길을 가다 보면 사은품 가방을 든 아줌마들이 투자설명회 장소를 안내할 때가 있다. 공짜 좋아하다 코 꿰기 싫어 사양하고 지나치지만 길 가 작은 탁자에 놓인 일회용 물티슈가 붙은 전단지를 집어 온 적은 있다. 오피스텔이 들어서는데 수익이 쏠쏠한 투자처란다. 삐딱한 나는 이런 생각을 한다. 그렇게 수익이 좋은 알짜 투자라면 모르는 사람에게 권할 게 아니라 형제자매나 친지들에게 권하지 일면식도 없는 나 같은 사람에게까지 기회를 주냐는 거다. ..

네줄 冊 2021.02.17

아침을 볼 때마다 당신을 떠올릴 거야 - 조수경

작년부터 읽고 싶었던 책인데 드디어 읽었다. 집콕을 한 설날 연휴 덕이다. 소설을 거의 안 읽는 편인데도 이 소설은 발간 소식을 듣고 바로 목록에 올렸다. 소제가 조력자살에 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나는 예전부터 안락사를 적극 지지한다. 더 이상 살아야 할 이유를 느낄 수 없을 때 안락사는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서우는 학교 폭력에 시달리다 학교를 자퇴하고 방안에 갖혀 은둔형 외톨이가 된다. 모든 사람에게 완전히 말문을 닫아 버렸는데 오직 엄마와만 최소한의 소통을 한다. 그것도 휴대폰 문자로만이다. 아버지도 자기 때문에 세상을 떠나면서 그는 더욱 방안에서 나오기를 거부한다. 그가 매일 탐색하는 일은 어떻게 죽을까이다. 드디어 한국에도 죽음을 도와주는 센터가 생겼다. 이제는 안락사를 원해 스위스까지 ..

네줄 冊 2021.02.16

한 남자 - 히라노 게이치로

사랑했던 남편은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둘 다 재혼이라는 것을 알고 결혼 생활을 했지만 남편이 생전에 고백했던 자신의 과거는 완전 가짜였다. 이혼 후 고향 부모님 집으로 내려 온 는 라는 한 남자와 사랑에 빠진다. 자식까지 낳고 살던 4년 간의 행복도 잠시, 다정하고 성실했던 남자가 사고로 죽는다. 남편의 가족에게 연락을 하자 모르는 사람이란다. 세상에,, 사랑했던 남편이 자신의 과거를 숨기고 살았던 가짜였다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리에는 예전에 이혼 할 때 도움을 줬던 변호사 에게 남편의 과거를 찾아 달라고 부탁한다. 소설은 이제부터 기도의 발길을 따라 탐정 소설을 읽는 것처럼 흥미진진하게 펼쳐진다. 영화를 보고 감명이 깊으면 감독의 과거 작품을 찾게 되듯 소설도 마찬가지다. 는 한국에도..

네줄 冊 2021.0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