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줄 冊

친애하는 나의 집에게 - 하재영

마루안 2021. 3. 6. 21:06

 

 

 

잔잔하게 울림을 주는 좋은 책을 읽었다. 문장에 글쓴이의 모든 것이 들어 있다고는 할 수 없어도 어느 정도 정체성을 짐작할 수는 있다. 그럴 듯하게 인생을 꾸며낼 능력이 있는 작가들은 더할 것이다. 그걸 감안하고 읽어도 이 책은 감동적이다.

 

내가 집에 대한 생각이 유난히 애틋하기에 더 그랬을 것이다. 누가 지은 건지는 몰라도 집은 사는 것이 아니라 사는 곳이라는 소박한 문장을 좋아한다. 집을 편안한 보금자리로 여기는 것보다 시장 값어치로의 판단이 앞서는 시대이기에 이 책의 울림은 더욱 크다.

 

대구에서 나고 자란 작가 하재영은 어릴 적 집에 대한 추억으로 시작한다. 나도 어릴 적 살았던 집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지금도 집 도면을 뚝딱 그릴 수 있을 만큼 뚜렷하다. 마당 모퉁이에 장독대가 있었고 장독대를 지나면 늙은 감나무가 서 있었다.

 

저자는 부모님의 사랑을 받으면서 자랐지만 어릴 적 집에 대한 생각은 쓸쓸함 자체다. 대구 신도심 학군 좋은 곳에서 살았던 집이 신분을 가르는 도구였음도 알게 된다. 이후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며 온갖 집을 전전한다. 고시원이나 옥탑방은 아니지만 방세 싼 곳을 찾다 보니 서울 변두리를 전전하며 달동네에서 살았다.

 

작가가 살았던 동네는 늘 싸움이 일어나는 곳이었다. 부부가 험악한 욕설을 주고 받으며 싸우는 소리도 자주 들었다. 점잖은 이웃을 만났다고 생각했는데 어느날 그 선생님이 어떤 사람에게 일방적으로 욕설을 듣고 있었다. 문장 곳곳에 세상을 보는 저자의 착한 심성을 느낄 수 있다.

 

<세상에는 열악한 환경에서도 품위를 잃지 않으려고 애쓰는 사람이 있었다. 그런 사람조차 기어이 바닥을 드러내게 만드는 동네가 있었다. 품위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내가 존중받기를 원하는 만큼 타인을 대접하는 사람, 나의 상처가 아픈 만큼 남의 마음을 섬세하게 헤아리는 사람이고 싶었다. 품위는 인간에 대한 예의이자, 가진 것 없는 자가 자기혐오에 빠지지 않기 위해 마지막까지 지켜야 할 방어선이었다>. 

 

이런 사람에게 층간 소음이나 이웃 간의 분쟁이 생길 일이 있을까. 지방에서 대학을 마친 두 살 아래 동생이 서울에 취직을 하면서 함께 살기도 한다. 서로 나이를 먹고 애인이 생기면서 따로 살게 되나 좌충우돌 함께 살면서 자매의 애틋한 정도 깊어졌다. 이렇게 긍정적이고 착한 심성도 부모에게서 물려 받는 것일까. 

 

서울과 수도권 곳곳의 다양한 집을 경험했던 저자는 결혼을 하고는 몇 집을 거쳐 자기 집을 갖는다. 신혼 때는 물론 빌린 집이었다. 이제 어느 정도 생활이 안정되었고 자기가 꿈꿨던 주거 형태로 집을 꾸민다. 그러면서 많은 것을 포기하는 미니멀리즘을 실천하고 있다. 

 

이 대목이 마음에 든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헌옷을 버리듯 책을 버리기 때문에 항상 비슷한 권수가 유지된다. 읽지 않는 책들은 헌책방에 팔거나 필요한 사람에게 나눠준다>. 책이든 물건이든 정리하고 나면 얼마나 홀가분한지 경험하지 않으면 모른다.

 

이 책은 저자가 서울 구기동에 정착하는 것으로 마무리한다. 대출 받아 아파트를 구입해 시세 차익을 노리는 주택이 아니다. 말 그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사는 곳을 지향한다.

 

숲이 있는 구기동의 풍경과 건축가인 아버지와 함께 새롭게 꾸민 집안이 사진에 담겨 책 뒤편에 실렸다. 소박하면서 교양인의 품위를 느낄 수 있는 아름다운 집이다. 이 책은 저자가 살았던 집에 대한 이야기이자 어떻게 사는 것이 참된 인생인지도 알게 해준다. 좋은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