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줄 冊

아직 자라지 않은 아이가 많았다 - 정선희 시집

마루안 2021. 2. 26. 22:06

 

 

 

생각 같아서는 이 땅의 시집을 모두 읽고 싶다. 불가능한 일이지만 그 꿈은 여전하다. 어쩌다 걸려든 시집에서 가슴에 쏙 들어오는 시를 발견할 때 기쁨이란 겪어보지 않으면 그 묘한 희열을 모른다. 섹스할 때의 오르가슴은 그때뿐 곧 허무함이 밀려오지만 시집은 여운이 길다.

 

내가 이 맛에 시를 읽지라는 말이 나오게 하는 시집을 읽었다. <아직 자라지 않은 아이가 많았다>는 정선희 시인의 두 번째 시집이다. 다소 밋밋했던 첫 시집과 달리 이번 시집은 맛이 확실히 느껴진다. 한 사람의 시집인데도 읽는 맛이 이렇게 차이가 난다.

 

문학적인 비평이야 평론가들에게 맡기고 순전히 아마추어 생각이다. 첫 시집에 비해 쌉싸름한 맛을 느낀다. 요즘 출판사 상상인에서 몇 권의 좋은 시집을 발견한다. 내가 읽어 본 적이 없는 문예지도 발행하는 무명의 출판사지만 시집 발행을 주시하고 있다. 

 

서점을 갈 때마다 부지런을 떨지 않으면 이런 시집은 만나기 힘들다. 시집 코너에서 쪼그리고 앉아 한참 동안 무명 시집들을 탐색한다. 이런 시집들은 대부분 무릎 아래쪽에 있다. 평론가와 매스컴이 알려주지 않는 책은 구석에 꽂혀 있다 잊혀진다. 오늘은 어떤 시인이 숨어 있으려나.

 

뽑았다 다시 꽂고 몇 편 읽다 다시 꽂는다. 설렘과 아쉬움의 교차다. 묻혀 있는 시집을 발견하기 위한 치열한 탐색 끝에 이 시집과 인연이 닿는다. 내가 좋은 시집을 만났을 때 할 수 있는 일의 최선은 시를 열심히 읽고 조용히 응원을 보내는 것이다. 인연은 짧지만 감동은 길다.

 

쪼그리고 앉았다 일어 서자 머리가 핑 돈다. 오랜 증상이다. 짧은 어지럼증으로 잠시 눈을 감는다. 술에 취해 비틀거려 본 적은 많지 않은데 시집 읽다 비틀거리는 일은 가끔 있다.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라 시집 읽기는 늘 즐겁다.

 

예전에 어느 선배가 귀에서 매미가 자주 운다고 했다. 한여름도 아닌데 그 매미는 어쩌다 선배의 귓속에 자리를 잡았을까. 내가 얼마 전까지 비문증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듯 선배의 귀울음 증상을 이해하지 못한다. 인생을 알기에는 아직 멀었다.

 

바람 소리 들을 만큼 귀도 밝고 아직은 쓸 만한 눈이 있어 이런 시집을 읽는다. 다행이다. 아직 블로그에 올리지는 못했지만 긴 여운을 남기는 시 한 편을 또박또박 적는다. 보석까지는 아니어도 묻혀 있기 아까운 좋은 시집이다.

 

 

간결한 자세 - 정선희

하늘이 맑아 한바탕 잘 울었다

날카로운 햇살에 옆구리를 찔린 난간이 드러났다
비로소 난간의 방치된 만큼 공손해진 그늘을 본다

가계부에서 해석할 수 없는 슬픔의 구석을 지우고
밤과 낮의 궤도를 돌아온 뒷걸음의 목록을 다시 쓴다

사거리에서 몇 십 년째 목격자의 행방을 묻는 바람은
여전히 흩어지는 플래카드의 윤곽을 붙잡는다
수직으로 움직이는 편향력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새들의 세상은 오른쪽과 왼쪽을 조율한다

오른쪽을 맞추면 왼쪽이 왼쪽을 맞추면 오른쪽이
문득문득, 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