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줄 冊 425

봉인된 시간 - 신철하

코로나 시대에 일상이 엉망이지만 그래도 영화는 끊지 못한다. 공연장이나 전시장 나들이는 아직 꿈도 못 꾸고 가능하면 식당 출입도 자제하거나 머뭄을 최소화한다. 모임이나 술자리 참석도 안 간 지가 까마득하다. 인간 관계 소원해질 염려보다 방역수칙이 먼저라는 생각이다. 둘 이상 갈 때 빼고는 영화관 출입은 보통 주말 오전을 이용한다. 인기 영화보다 남이 잘 안 보는 다큐 영화나 독립 영화를 좋아하는데 그런 영화일수록 오후보다 오전 시간에 많이 상영한다. 관객이 거의 없어 거리두기 걱정도 없고 요금도 싸니 일석이조다. 얼마전 토요일 오전에는 나 혼자서 영화를 봤다. 극장을 자주 못 가서 생긴 영화 굶주림을 넷플릭스로 푼다. 극장에서 보는 것만큼의 감동은 못 느껴도 잘만 하면 극장 나들이 못하는 아쉬움을 달래기..

네줄 冊 2021.04.15

당신은 첫눈입니까 - 이규리 시집

코로나라는 난데 없는 바이러스 때문에 작년 봄을 잃어 버렸다. 지금 들으면 까마득한 옛날처럼 들리지만 작년 봄에는 마스크를 살 수 없었다. 믿기지 않지만 마스크를 사려는 긴 줄이 판매소마다 펼쳐졌다. 사고 싶어도 날짜가 맞지 않으면 사지 못했다. 날짜뿐 아니라 신분증이 있어야만 마스크를 살 수 있었다. 마스크 대란 속에서 내년 봄은 온전히 맞을 수 있겠지 기대했다. 미처 꽃구경 할 겨를도 없이 지나간 작년 봄에 이어 올 봄도 잃어 버렸다. 봄이 일찍 왔다. 꽃도 일찍 피었다. 다른 때 같으면 이제 막 봉오리를 내밀 꽃들이 올해는 이미 지고 없다. 어떻게든 적응하며 살기 마련이라 익숙해지긴 했어도 여전히 많은 게 엉망진창이다. 이런 일상에서 그나마 책이 있어 위로를 받는다. 특히 올 봄에 좋은 시집을 많이..

네줄 冊 2021.04.06

수건은 젖고 댄서는 마른다 - 천수호 시집

드디어 천수호 시인이 세 번째 시집을 냈다. 일상에서 드디어라는 단어를 쓸 곳이 여럿 있기에 나도 여기에서 드디어를 쓴다. 어쩌면 그의 세 번째 시집을 기다리고 있었기에 드디어가 더 반갑게 느껴진다. 남자 이름처럼 들리지만 천수호 시인은 여성이다. 꾸준하게 시를 쓰는 비교적 모범 시인에 속한다. 이 시집에 붙이는 드디어라는 부사도, 모범 시인 호칭도 내 맘대로 내린 결정이다. 평소 생각이 적어도 세 권쯤 시집을 내야 시인이라는 명함을 내밀 수 있다고 본다. 시인의 정체성을 온전히 가늠할 수 있을 때도 그 시인의 시를 세 권쯤 읽어야 한다. 이 시인도 드디어 나온 세 번째 시집에서 절정에 달했다. 첫 번째보다 두 번째 시집이, 두 번째 시집보다 이번 시집이 완성도가 높다. 시인은 동의 안 할지 모르나 내 ..

네줄 冊 2021.04.03

나는 절대 저렇게 추하게 늙지 말아야지 - 심너울

심너울의 소설은 늘 먼 미래를 이야기한다. 아니 먼 미래라 할 것도 없겠다. 서울 올림픽이 33년 전에 열렸듯이 지금부터 33년 후 정도의 미래다. 예전의 10년과 지금의 10년은 변화 속도가 다르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속담이 있긴 해도 50년 전만 해도 10년 세월에 지금처럼 변화가 빠르지는 않았다. 예전에 지금처럼 컴퓨터나 스마트폰 세상이 올 줄 알았던 사람이 과연 있었을까. 그러나 근 미래에 인공지능 시대가 열리고 자율주행차가 거리를 접수할 거라는 것쯤은 예상을 한다. 심너울 소설에서도 여러 곳에 기계가 지배하는 세상이 나온다. 인구가 줄어 들어 딱 한 명의 학생이 있는 초등학교가 있다. 한 명의 학생을 위해 교사 두 명, 조리사 한 명, 학교 관리인까지 4명이 근무한다. 4학년인 이 학생..

네줄 冊 2021.03.29

동자동 사람들 - 정택진

서울 토박이들도 서울 도심에 있는 동네 이름을 잘 기억하지 못한다. 행정동명은 그런대로 알고 있어도 법정동명은 이런 동네도 있었나 할 정도로 아리송한 동들이 많다. 수시로 서울 도심을 걷는 편인데 걷다 보면 듣도 보도 못한 동 이름이 꽤 된다. 북촌 근처에 있는 팔판동, 소격동, 체부동, 을지로 부근의 산림동, 입정동, 예관동, 서울역에서 가까운 서계동, 문배동 등이다. 용산구에 속한 동자동도 마찬가지로 서울역 맞은 편에 있으나 아는 사람이 많지 않을 것이다. 동자동은 종로 3가와 함께 예전에는 서울 도심의 대표적 집창촌이었다. 서울역과 남대문 시장이 가까워서 나그네들의 성적 욕구를 해소하기에 좋은 위치다. 성매매 단속으로 윤락업소가 떠난 자리에 노동자들의 값싼 숙소로 이용되었다. 현재 동자동은 서울의 ..

네줄 冊 2021.03.26

대한민국 인구, 소비의 미래 - 전영수

불과 30년 전까지 아이를 낳지 말자는 표어가 있었다. 가족계획이라는 선진적(?)인 삶을 표방하던 시절이었다. 라는 표어에서 으로 바꼈다. 그랬던 나라가 이제는 세계에서 가장 낮은 출산율 때문에 비상이다. 아직까지는 인구 감소에 대한 부작용이 피부에 와 닿지 않지만 이대로 가다가는 먼 훗날 한국이 소멸 국가 맨 앞자리에 놓일 수도 있을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아이 많은 가정에 각종 불이익을 줬음에도 자식을 줄줄이 낳던 시절이 그립다고 해야 할까. 이렇게 세상은 변했다. 10년 전까지도 한국이 출산율 낮은 것으로 세계 1등을 할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이 책은 인구 감소에 따른 한국 사회 현상과 소비 변화를 세세하게 언급하고 있다. 이미 난데없는 코로나 사태로 인해 소비 패턴이 많이 변하기는 했다..

네줄 冊 2021.03.21

악의 평범성 - 이산하 시집

이산하 시인이 드디어 시집을 냈다. 22년 만에 나온 그의 세 번째 시집이다. 예전에 어쩌다 보니 그의 시집 를 읽었다. 인상 깊은 시집을 읽으면 시인에 대한 궁금증은 당연 따라온다. 이후 라는 그의 산문집을 읽고 이 시인을 온전히 마음에 담았다. 시대와의 불화 때문인가. 너무 긴 시간 시집이 나오지 않는 것을 보고 영영 시 쓰기를 단념한 것인가 했다. 그러면서도 행여나 하면서 기다렸던 시인이다. 기다린 보람이 있는 아주 묵직한 시집이다. 시인도 내용도 출판사 창비하고 딱 어울린다. 빌려온 것이지만 이라는 제목이 그의 시와 잘 맞는다. 문학계에도 권력이 있어 가끔 들리는 메이저 출판사의 횡포에도 불구하고 창비에서 나오는 시집은 빼놓지 않고 들춰본다. 창비 시집이라고 다 좋기만 할까. 나는 메이저보다 2등..

네줄 冊 2021.03.15

쇠유리새 구름을 요리하다 - 심명수 시집

사춘기인 10대 중후반 시절을 온전히 인천에서 보냈다. 6년 정도의 기간이지만 한창 호기심 많던 시절이어선지 고향처럼 느낀다. 그때 살았던 인천의 달동네 골목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당시 살았던 동네 뒤편 야트막한 산에 장애인 학교가 있었다. 아마도 시각장애인을 위한 특수학교였을 것이다. 무엇 때문인지 불량기 있는 동네 아이들조차도 웬만해선 그쪽으로 가지 않았다. 어른들만 급한 일이 있을 때 지름길 용으로 다녔을 뿐이다. 내게도 장애인 형이 하나 있었다. 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떠나고 아버지의 유산인 빚더미와 줄줄이 남은 자식들을 어머니 혼자 감당해야 했다. 설상가상 갑자기 초등학교 다니던 형이 다리를 쓰지 못하게 된 것이다. 심하게 다리를 절게 된 형은 바깥 출입을 하지 않았다. 어머니와 형은 서로..

네줄 冊 2021.03.12

교복 위에 작업복을 입었다 - 허태준

제목부터 울림을 주는 책이다. 는 실업계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병무청이 지정한 산업체에서 일하며 군복무을 해결한 청년 노동자의 이야기다. 저자의 글솜씨 덕분에 단숨에 읽어 내려가게 하는 힘이 있다. 한국에서 고졸은 다소 애매하다. 열에 일곱 여덟은 대학을 가는 판국에 고졸을 바라보는 시선도 애매하다. 사고 치고 짤린 불량 학생으로 치부한다. 공부는 더럽게 못하면서 으슥한 골목에서 담배 꼬나 물고 힘 없는 애들을 협박해 돈을 갈취하기도 한다. 대부분 이런 시선을 보낸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 대학을 못 갔든, 불량 학생으로 놀다 공부를 포기했든 간에 고졸의 앞날은 가시밭길이다. 대학을 졸업해도 취업이 까마득한데 고졸은 더하다. 일할 수 있는 직종도 한정적이다. 모든 기업은 사원을 뽑을 때 4년제 정규대학 졸..

네줄 冊 2021.03.11

억척의 기원 - 최현숙

얼마전에 일제와 싸운 독립운동가 중에 알려지지 않은 사람이 많다는 기사를 읽었다. 특히 여성 독립운동가들이 더 그랬다. 남성보다 여성이 독립 운동을 더 많이 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전혀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역사에 기록된 여성 독립운동가는 손에 꼽을 정도다. 그만큼 알려지지 않고 묻혀버린 여성들이 많다는 얘기다. 이 책 도 여성들 이야기다. 저자인 최현숙 선생은 구술생애사를 개척한 사람이다. 저자가 걸어온 길에 굴곡이 많아서인지 그가 쓴 책에 나오는 사람들도 파란만장하다. 독립운동가나 기업인, 정치인 같은 유명인의 삶만 조명을 받는 시대에서 이런 책은 참으로 소중하다. 따지고 보면 누구의 인생이든 소중하지 않으랴. 티끌 같고 이슬 같은 인생이라지만 나는 모든 사람의 인생은 우주적이라 생..

네줄 冊 2021.03.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