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별이 빛나는 낮에 - 손음

마루안 2021. 8. 18. 19:32

 

 

별이 빛나는 낮에 - 손음

 

 

이제 더 이상 살 수 없겠구나 말하면 희망이 화를 내겠지

이제 겨우 살 수 있겠구나 말하면 절망이 화를 내겠지

햇볕이 앙상하게 부는 날 검정 우산을 쓰고

나는 해변으로 갔지

대낮에도 반짝반짝 밤하늘이 펼쳐져 있는 곳이지

대낮에도 불을 켠 기차가

미친 듯이 지나가는 곳이지

나는 매일 우산을 쓰고 해변으로 갔지

아무라도 날 알아볼 수 있도록

비를 쓰고 구름을 쓰고

누명을 쓰고

 

파도가 최선을 다해 밀어 올린 해변의 것들

피붙이같이 엉켜 있네

나도 그 곁에 쪼그리고 살면 안 되나

슬픈 일은 혼자 앓아야 하는데도 

모래와 파도와 죽은 갈매기에게

두근두근

내 얘기를 털어놓기에도 하루가 짧았지

내일도 해변으로 갔지 모레도 해변으로 갔지 영원히 갔지

나는 날마다 그곳에서 무엇이든 쓰고 썼지

누명이든 고통이든 쓸쓸함이든

 

 

*시집/ 누가 밤의 머릿결을 빗질하고 있나/ 걷는사람

 

 

 

 

 

 

맨드라미 - 손음


맨드라미 트럼펫이 길게 울려 퍼진다
프라이팬처럼 달궈진 마당에
발을 덴 수탉이 뒤뚱거리며 마당을 빠져나간다
식구들은 평상에 앉아서 더위를 구워 먹는다

맨드라미가 여름을 길게 분다
붉은 피를 뒤집어쓴
맨드라미가
길게 울려 퍼진다

붉은 살점 같은 맨드라미 활짝 피었다
붉은 고기가 석쇠 위에서 지글지글 익어 간다
식구들도 따라 지글지글 익어 간다

식구끼리 욕을 한다 고기보다 붉은 욕을 고기 굽는다
땀을 뻘뻘 흘리며 욕을 만든다

자, 자 그래 봤자 우리는 식구다
식구들이 기름진 입가를 엉엉 웃는다
그래 봤자 우리는 식구다
그래 봤자, 그래 봤자다

모르는 척 고기가 익어 간다
맨드라미가 식구들을 길게 분다

 

 

 

# 손음 시인은 1964년 경남 고성 출생으로 1997년 부산일보 신춘문예와 월간 <현대시학>에 시가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시집으로 본명인 손순미로 낸 <칸나의 저녁>이 있다. <누가 밤의 머릿결을 빗질하고 있나>가 두 번째 시집이다. 제11회 부산작가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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