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얼어 있는 말들을 위한 시간 - 김지명

마루안 2021. 8. 22. 19:28

 

 

얼어 있는 말들을 위한 시간 - 김지명


모자랄 게 없어 눈 밖을 몰랐다

초원은 어디든 빈집이었지만
눈에 불을 켰다 끄고 마는 풋풋한 마을이었다

푸르름으로 인심을 얻고 잃었지만
서두르  않는 보행법은
슬픔이 놀다 갈 등걸을 마련하는 것
빈 옆구리로 쏟아져 내릴 추억을 앓고 있는 것

익숙한 밤낮이 잘 숙성되었지만
먹지 않을 풀은 건드리지 않는
약시의 코뿔소

아무도 이상 기온을 말해 주지 않았지만
초원에 이만 년 만에 폭설이 내렸다 한다

폭설은 처음 보는 먼지라서 괘념치 않았지만
차가움의 촉감이 풀 가시처럼 박혔다 한다

몸에 살지 않는 차가움으로 미쳐 날뛰었지만
이웃들 점호하듯 폭설이 짓밟고 갔다 한다

웅크린 이웃이 짧은 다리로 헤쳐 나가려 했지만
야크처럼 털이 없어 추위를 내치지 못했다 한다

추위는 정지된 세상으로 초원을 정복하려 했지만
사방 비명의 나팔 소리로 눈발은 머뭇거렸다 한다

비명은 몸에서 분리된 뿔로 천명을 다하려 했지만
진군하는 폭설에 백기를 들었다 한다

백기 든 태양도 초원도 지평선도 얼음이 되어
코뿔소는 미라가 되었다 한다

도망자로 살아 봤다면 먼 근친들이 훗날을 걷고 있음을 알았다면 경계에 사는 자만이 새로운 땅을 갖는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시집/ 다들 컹컹 웃음을 짖었다/ 파란출판



 

 

 

주머니 - 김지명


은밀을 주어로 한다
입구에는 초병 같은 소모품들이
저요 저요 신상을 밝히는 소음이 느리다
어느 줄에 서서 네가 오는지
한쪽이 열렸지만
기미는 없다
가십거리 숲으로 생각 없이 들어간다
모르는 사슴과 모르는 사냥꾼이 서성거린다
흰 장갑을 낄까 검은 장갑을 낄까
망설임은 기도 같아서
머릿속에 병기가 들어 있지 않아도
흰 장갑 검은 장갑 착용은 분위기가 만드는 법

입안에 알사탕을 물고 시간을 굴리면
후면 가장자리에
사슴 사냥꾼이 큰기침을 한다
짧고 신통한 전율
손맛과 뒷맛이 꼭꼭 숨어 있는

보름달에 빠져 버린 지구 같아서
퇴근하는 지하철 만원 속 같아서

아무에게나 말을 걸거나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 김지명: 2013년 <매일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시인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쇼펜하우어 필경사>, <다들 컹컹 웃을 짖었다>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