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장미 찾아오시는 길 - 이은심

마루안 2021. 8. 22. 19:23

 

 

장미 찾아오시는 길 - 이은심


재건축반대 현수막이 장마에 지워지는 쪽문 근처입니다

잔가지를 치려다 서로의 목을 칠까 가시를 안아주는 곳입니다

붉음의 머리맡을 넘어가면 누가 죽는다는데 방금이 작아지면서 철조망을 넘어갔습니다 그런다 해도 장미는 또 장미

잘 놀던 꽃망울이 무더기무더기 감염되면 아무도 심지 않은 눈꺼풀이 초대될 차례입니다

꺾어야 꽃인 걸
붉다고 다 마음이 아닌 걸
무얼까 넝쿨 다음 불어닥치는 이것은

첫 화장을 시작하는 눈시울은 피고 지고 뜨거웠고 일정대로 후줄근했고

자그마한 채소와 하얀 뿌리와 일요일 같은 꽃그늘을 버스 두 대가 나란히 달리는 이쪽과 저쪽

세상을 건드린 건 가시가 먼저였습니다

담장과 담장의 간격이 속은 것처럼 붉다고 말했던가요
욱신거리고 후끈거리느냐고 물었던가요

천박이 없어서 나는 겨우 붉다 하겠습니다

자세만으로 만발하고 숨어있을 때 반반하다 하겠습니다

절반은 하늘에 절반은 땅에
위독만이 온전한 꽃망울이겠습니다

 

 

*시집/ 아프게 읽지 못했으니 문맹입니다/ 상상인

 

 

 

 

 

 

마네킹 - 이은심


난감할 때 죄가 되는 보라를 보았니
한때 보라를 사랑한 건 그녀를 사랑한 것
그녀를 사랑한 건 감기 기운 같은 과거와 코밑의 미래를 사랑한 것

구름의 팔짱을 껴도 볼 수 있는 태양이 되어 줘
유리에 반사되는 말이 말을 걸어오다가
바이올렛처럼 아파,하면 휜 등이 보이고 그냥,이라고 하면 쇄골이 사라진다

어느 날은 우연이
어느 날은 아무 것도 아닌 만약이
손을 내밀어

윈도 밖에서 더 대담하도록
우리 안에서 더 서성이도록

잡힐 듯 아니 잡힐 듯 색 쓰는 매니큐어를 발라주었다 그녀가 그녀다워질 때 난감이 사라지듯

 

아니오 아니오

젊음을 멈추게 하는 젊음처럼
한 발짝만 더 안으로 드시게

불을 끈 알몸이 죽거나 살아남거나 우리는 서로였으면 좋겠어
더딘 화색같이 오늘은 우리끼리 있어
보라에서 떨어져 나와
상점과 상점 사이에

 

 

 

 

# 이은심 시인은 대전 출생으로 한남대 영문과를 졸업했다. 1995년 대전일보 신춘문예 시부문 당선, 2005년 계간 <시와시학> 신인상을 수상했다. 시집으로 <오얏나무 아버지>, <바닥의 권력>, <아프게 읽지 못했으니 문맹입니다>가 있다. 2019년 대전일보문학상, 한남문학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