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야생의 분석 - 이자규

마루안 2021. 8. 19. 19:45

 

 

야생의 분석 - 이자규


못난 버드나무만 베어져 둑 아래 던져졌다
십 년 후에나 읽힐 시를 쓰는 밤
돛대도 없이 삿대도 없이
버들잎들은 물 위로 떠났다

밟히면 밟힐수록 피가 도는 근성
목이 없어서 얼굴 밟히는 꽃
민들레 길 밟은 그날부터 내 목에서는
모래가 섞여 나왔다

야생동물 보호구역에서
탱탱한 쓸개를 따오는 야생의
그림자들도 있다
고성능 도시에서 기르던 늙은 고양이가
산으로 가서 돌아오지 않았다

장례식장 옆에 예식장이 새로 들어섰고
두 건물을 방문하는 꽃의 색깔은 서로 달라
생이별과 행복 세트가 나란히 살고 있다

기를 쓰고 길을 내는 사람들의 대도시란
산에서 내려온 멧돼지의 식욕 아닐까
남새밭을 헤적여 모종을 핥아먹고 사라졌다

 

 

*시집/ 아득한 바다, 한때/ 학이사

 

 

 

 

 

 

물구나무 - 이자규

 

 

두 팔목으로 바닥을 짚어 사죄의 한 방식인 양

발바닥으로 공중을 들어 올렸다

희디흰 아이가 까르르까르르 웃는데

배턴을 받듯 입꼬리를 방긋 올리는 아비

아이 웃음 강도가 높으면 높을수록 목울대 부풀어 뜨겁다

웃음을 지탱하는 입꼬리와

목울대 사이 심오한 경계선이 있다

 

넘어져야 웃음이 되는 치병놀이 혀 깨물고 하다 가랑이 흔들고 하다

핏기 없는 발목을 장롱에 기댔다 덕장 오징어가 거꾸로 붙었다

 

일곱 해 떨어져 산 아빠의 정을 당겨보라는 담당의의 말

소아  2프로 명줄을 웃음이 끌고 가는 중

웃음은 아이를 안고 꽃잠에 들었다

모다 내 탓이다 내 다 가져갈게

아비가 이불 뒤집어 머리를 처박고 주술을 외웠다

 

아이가 원하는 건 외항선에서 돌아온 아비

아비뿐이다

잠 깬 아이가

이불 밖 둥그스럼 물구나무를 보고 활짝

까르르까르르 웃었다

 

 

 

 

# 이자규 시인은 경남 하동 출생으로 2001년 <시안>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우물 치는 여자>, <돌과 나비>, <아득한 바다, 한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