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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이 나를 삼켰다 - 천양희

그 말이 나를 삼켰다 - 천양희 아름다움이 적을 이긴다고 하기에 미소 짓는 이 꽃이 내일이면 진다는 걸 믿지 않았다 할 수 있을 때 장미 봉오리를 모아야 한다기에 한낮의 볕이 그늘 한뼘 들여놓는 걸 잊지 않았다 불은 태울 수 없고 물은 물에 빠질 수 없다기에 사람이라도 좀 되어보자고 결심했다 끝없는 풍경은 밖에 있지 않고 안에 있다기에 세상에 드러나 부끄럽지 않은 것이 꽃밖에 더 있을까 생각했다 삶에는 이론이 없다기에 우리가 바로 세상이란 걸 알게 되었다 모든 것이 변했는데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기에 붓 쥔 자는 외로워 굳센 법이란 걸 이해하게 되었다 내가 갈피를 잡는 동안 그 말이 나를 삼켰다 *시집/ 지독히 다행한/ 창비 푸른 노역(勞役) - 천양희 바람은 잘 날이 없어 어쩌면 목 놓은 소리로 헤메는..

한줄 詩 2021.08.02

머나먼 나라 - 이상원

머나먼 나라 - 이상원 -천년송(千年松) 비탈진 바닷가 관광 일주도로가 생기면서 뒷산이 마을을 데리고 대륙과 한통속이 된 것은 오래전 일이었다. 바다에 막혀 오도 가도 못하는 자투리 새로 생긴 지번의 묵은 암석 위에는 세월의 천 년 굴욕을 견뎌온 소나무 한 그루 안쓰러워 치솟은 암반이 속내를 열어가며 한 폭을 받혀줄 뿐, 쉼 없는 해풍에 가지도 키도 잃고 하늘만 바라 엎드린 저 애껴운 혈혈단신. 웃자란 벚나무들 무더기로 상춘의 꽃 등을 다느라 지척에서 길은 밤에도 환하게 밝은데, 한 때일 뿐이야 자위하듯 중얼거려도 보고 머리를 연신 조아리며 지나가는 배들의 한낮을 그리운 옛적인 양 굽어보며 더러 씁쓸하지만, 그래도 남몰래 여무는 솔씨들 눈빛을 반짝이며 잃어버린 먼 산을 바라보고 있다. *시집/ 변두리/ ..

한줄 詩 2021.08.02

언젠가는 부디 - 윤의섭

언젠가는 부디 - 윤의섭 이 말은 다가오지 않은 날들에 거는 주문에 쓰였는데 이루어진 게 없어요 효력이 약해서는 아니었어요 지켜보지도 않고 떠나버렸기 때문이죠 이 말은 간절하지만 무능력하고 때론 무책임하고 부디 내일 해가 뜨기를 이런 말은 어색하지만 세상의 모든 미래에 붙일 수 있는 염원 저주에 쓰이기도 하지요 후회할지라도 정말 견디기 힘들면 그러나 이 말에는 이미 언젠가는 같이 있지 않을 거라는 예언이 들어 있어요 하지 말았어야 하는 소원을 말해버린 거지요 행복하길 잘 살길 건강하길 꿈을 이루길 이 말은 축복을 주고 떠나갈 때 잘 어울리는 말이지요 쓰지 않을 말들의 사전을 작성 중입니다 사람 이름도 들어가고 연월일 잊고 싶은 날짜도 수록됩니다 부디 원뜻 : 바라건대 꼭 다른 뜻 : 곁에 없더라도 꼭 다..

한줄 詩 2021.07.31

나비는 생각도 없이 - 김가령

나비는 생각도 없이 - 김가령 허공에서 허공으로 호랑거미 한 마리가 교차하며 집을 지어놓았어요 태양과 바람과 생각은 다 빠져나갔는데 나비 한 마리 덜컥 걸려들었어요 출렁, 아이가 던진 돌의 파문 길은 찢어지고 거미는 달아나고 끈적이는 날갯짓이 얕은 숨을 뱉어냈어요 해가지는 방향으로 모퉁이를 품고 걸어요 길은 막다른 표정을 내밀고 나는 모퉁이를 보고 모퉁이는 나를 봐요 작은 새 한 마리 그늘을 쪼며 이쪽에서 저쪽으로 옮겨와요 검은 새가 눈물을 흘려요 하늘 위에서 보면 골목은 거미줄 같겠지요 난 그곳에 걸려든 한 마리 짐승 그날의 거미는 다시 더 높은 나뭇가지로 기어올라 견고한 집을 지을 거예요 그날의 나비가 또 생각도 없이 날아오겠지요 생과 사가 맞물린 모퉁이 셀 수도 없는 직전과 직후가 나를 선택하고 있..

한줄 詩 2021.07.31

비문증(飛蚊症) - 천수호

비문증(飛蚊症) - 천수호 꿈과 현실 나는 헷갈렸지만 모기는 피도 없이 들락거렸다 코를 골고 있는 너를 내려다보면 꿈 밖으로 터져나오는 현실의 비애 따위는 꿈에 긁는 한 쪽 뺨이었다 웃는 너는 종종 꿈속에서만 만났고 한 방울의 피는 현실에서 빠져나갔다 잠 속에서 뺨을 치며 너는 모기를 쫓고 있지만 현실에선 도무지 터지지 않았다 꿈 밖에는 쫓는 눈이 많아서 꿈속에서 손을 쓰는 건 속수무책이다 가끔 네 손을 대신해서 너의 뺨을 한 번씩 긁어주지만 눈을 뜨지 않는 너보다 나는 더 깜깜해져서 물어뜯긴 이빨을 찾지 못했다 나를 더듬어 찾던 네 손이 경계를 허문 내 옆구리에 잠시 닿았다 간다 네가 거두어 간 것은 빈손이었지만 나는 자꾸 앓듯이 피를 닦았다 *시집/ 수건은 젖고 댄서는 마른다/ 문학동네 불면증(不眠症..

한줄 詩 2021.07.31

졸음이 깔리기 시작한 낯선 방 - 이기영

졸음이 깔리기 시작한 낯선 방 - 이기영 바다는 여전히 환하고 달마중이나 기다리는 정박한 배들은 늙은 어부의 발소리를 귀신같이 알고 있지만 바람 속에서 저 혼자 무너지고 있는 지붕 언젠가 구급차에 실려 간 늙은 어부마저 돌아오지 않으면 혼자 남겨진 폐가 마당에 손질하다 만 그물이 뱀 허물처럼 아무렇게나 뒹굴고 페인트칠 벗겨 나간 담장에 하릴없는 담쟁이만 때 이른 장마를 몰고 와 청춘의 푸른 피처럼 흘러갈 것이다 *시집/ 나는 어제처럼 말하고 너는 내일처럼 묻지/ 걷는사람 글루미 선데이 - 이기영 택배를 받아 커터칼로 상자를 열었을 때 상자 안은 곧 터질 듯 수상한 공기 방울들로 가득했다 위험을 감지한 복어처럼 상품을 둘둘 말아 빵빵해진 공기의 방들 핥아 줄 수도 다독일 수도 없는 짧은 혀를 가져서 혼자인..

한줄 詩 2021.07.30

팽나무의 궤도 - 김점용

팽나무의 궤도 - 김점용 아침을 먹고 동네를 한 바퀴 돌아왔을 때 팽나무는 거기 있었다 아버지와 싸우고 멀리 지구를 한 바퀴 돌아왔을 때도 팽나무는 그 자리에 있었다 어떤 집은 망하고 어떤 집은 흥했다 당집 할머니가 죽은 개 한 마리를 색동 줄로 칭칭 감아 둥치에 매면서 그날 밤 팽나무의 궤도를 정해 주었고 팽나무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비를 맞고 눈을 맞고 바위처럼 산처럼 서 있었다 달도 별도 팽나무 위에서 뜨고 졌다 태양은 오늘 출발했으나 팽나무는 어제 도챡해 있었다 집도 들판도 구름도 결혼도 장례도 모든 것이 팽나무를 중심으로 돌고 돌았다 돌고 돌아서 팽나무 안으로 들어갔다 차례차례로 들어갔다 꽃이 되고 열매가 되고 팽이가 되었다 바람에 마른 잎이 빙그르르 날린다 작은 회전이 큰 회전을 숨긴다 *시집..

한줄 詩 2021.07.30

거문도에서 - 이형권

거문도에서 - 이형권 겨우내 바다는 얼마나 외로웠을까요 거친 파도가 밀려드는 수평선 너머 저 혼자 장판지 같은 하루를 접었다 펼쳤다 바다는 속절없는 날들이 얼마나 쓸쓸하였을까요 바람 부는 모퉁이 벼랑길을 돌아서면 한겨울 매서운 해풍 속에서 앓던 열병을 동백꽃은 알고 있지요 그래서 잎새마다 선연하게 피꽃을 피워낸 것이지요 거역할 수 없는 운명만이 오직 붉은 가슴으로 피어나 겨울 바다의 쓸쓸함을 연모했을 뿐 지난 세월을 말해 무엇하리오 남풍이 지나가는 길목에는 명주실 같은 봄빛이 반짝이고 어느덧 사랑과 이별의 경계에 이르렀습니다 세상의 길들이 저녁노을처럼 아득해지고 보이지 않던 추억들이 뚜렷해지는 시간 홀로 그대의 열망을 사랑했던 날들만이 남았습니다 손 내밀어도 닿지 않을 변방의 극지에서 찬란한 애모 빛깔로..

한줄 詩 2021.07.29

자수 혹은 고백 - 피재현

자수 혹은 고백 - 피재현 할머니 돌아가신 날 할머니의 쌈지를 훔쳤다 할머니는 가끔 그 쌈지를 열어 나에게 용돈을 주셨다 고쟁이 속에 손을 넣어 쌈지를 꺼내면 퇴계선생 하얀 심의(深衣) 차림으로 오솔길 걸어 나왔지만 주머니 속에는 세종대왕 우글거릴 것 같았던 매혹적인 주머니 두근거리는 가슴 닫아걸고 뒤안 정짓문 아래 쪼그려 앉아 열어 본 주머니에는 부적 한 장, 호박단추 둘, 내 중학교 교복에 붙었던 명찰 하나 들어 있었다 세종대왕은 어디로 몽진(蒙塵) 가시고 없고 퇴계선생 낯익다는 듯 내 행실을 꾸짖었다 그날 나는 할머니와 사별이 슬펐던지 앙꼬 없는 찐빵을 가른 것 같은 서운함 때문인지 엉엉 서럽게 많이도 울었다 그런 나를 보고 문상 온 사람들은 참 대견한 손주라고 그랬다 제사 때마다 엎드려 30년을 ..

한줄 詩 2021.07.29

환멸에게 보내는 쪽지 - 박순호

환멸에게 보내는 쪽지 - 박순호 헝겊인형 가슴을 훔친 솜뭉치에서 선반을 주저앉힌 녹슨 볼트에서 애타게 사람을 찾는 전단지에서 종이 결을 모르는 잉크 제멋대로 움직이는 마우스 표현할 줄 모르는 고장 난 턴테이블 너의 은유가 나를 집어삼킬 때 알아볼 수 없는 필체에서 곰팡이 핀 식빵에서 벽장에 갇힌 꽃병에서 세월을 갉아먹는 서까래 부러진 목발 너는 우울을 생산하는 공장에 나를 취직시킨다 *시집/ 너의 은유가 나를 집어 삼킬 때/ 문학의전당 구멍 - 박순호 -블루홀 깨울 수 없는 잠 빛이 도달하지 못하게 주먹 모양을 한 덩어리진 전설 벌어진 틈으로 속삭이는 공명음 들리는가 여기로 와서 나를 열어보겠는가 그것은 어디까지나 호기심 많은 당신의 몫 나는 부지런히 눈치를 보며 퍼즐을 맞춘다 몸의 질문은 부자연스럽다 ..

한줄 詩 2021.07.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