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느티나무 연가 - 이형권

마루안 2021. 8. 19. 19:29

 

 

느티나무 연가 - 이형권

 

 

느티나무처럼 푸르고 무성한 날이 있었다

강물을 따라서 노래가 흐르던

여울목을 건너던 나루터나

뗏목꾼이 쉬어 가던 주막집 어귀

느티나무는 꼭 돌아와야 할 언약처럼 서 있다

하늘의 별자리가 흐르듯 세월이 흐르고

다시 돌아올 시간을 헤아리듯 밤하늘을 바라보면

추억이 시작되는 어느 길목에

아직도 무성한 그리움처럼 느티나무가 서 있다

첫사랑이 또아리를 틀었던 곳

등불 같은 이야기가 서리서리 모여들어

바람처럼 몰려와 우수수하고 몸을 떨면

겨울밤처럼 춥고 외로웠던 곳

강 건너 세상을 꿈꾸며

이른 새벽 노 젓는 소리 강물을 깨울 때

느티나무는 홀로 운 적이 있다

강물이 스치고 가듯

떠나간 이들은 돌아오지 않고

소년들은 벌써 지천명이 되었다

 

 

*시집/ 다시 청풍에 간다면/ 천년의시작

 

 

 

 

 

 

다시 청풍에 간다면 - 이형권


초사흘 달빛이
부끄럽게 
입맞춤을 허락한다는
청풍에 간다면
필시 전생에 
어느 나루터에 두고 온
남색 저고리 같은 강물을
만날 것도 같은데
산마루를 넘어온 흰 구름이
미루나무 끝을 스치고 가듯
그대의 귀밑머리를 쓸어 올리며
서러운 이야기를 
풀어 놓을 것도 같은데
살구꽃이 지는 봄밤
불현듯 찾아낸 기억처럼
연분홍 설화지에 써 내려간 연서가
바람결에 실려 올 것도 같은데
청금석 같은 저녁 하늘가
홍방울새가 울고
호수에 붉게 스미는 노을
흔들리는 나룻배의 이물에 앉아
그대가 불러 주는 이별가에
다시 귀를 적실 것만 같은데

 

 

 

 

*시인의 말

눈보라 치던 길이 있었으며
별빛 헤아리던 밤이 있었다
넘실거리던 아침 바다를 걸었고
저무는 산사의 법고 소리에
가슴 미어졌다
떠도는 몸과 바라보는 
마음이 하나가 되었을 때
여행은 한 편의 시처럼 
내 곁에 있었으니
살아 있는 동안 나는
그 길을 떠돌며
오래 그리워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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