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말씀과 삶 -박민혁

마루안 2021. 9. 8. 22:18

 

 

말씀과 삶 -박민혁


요구하지 않은 기도는 하지 말아줄래요.
나의 믿음은 도식적이어서요.


많은 이웃을 사랑했어요.
양쪽 뺨 정도는 마음껏 내줄 수 있지요.
성애도 사랑이니까요.


퍼즐을 꼭 맞춰야 하나요?
예쁜 슬픔 한 조각이 갖고 싶을 뿐이에요.


일생을 학예회처럼 살고 싶지는 않네요.
어린이를 연기하는 어린이는 끔찍하죠.

칠 흙 같은 밤에는 차라리 하늘을 보고 걷듯,
내 기도는 지속되지만
아멘을 발음할 땐 신중해야 합니다.


반복되는 절망은 내 탓이 아니죠.
비극은 생의 못된 버릇 같은 거니까.


강대상 뒤에는 당신 몸에 꼭 맞는 침대
걸려 있는데 아버지, 외박이 잦네요.

남을 미워하는 건 이젠 관두기로 했어요.
내 온실 속에는 꽃 피우는 고통만 들이기로.


통증 없는 삶은 결코 범사가 아닙니다.
당신 같은 플라세보가 있어서 다행이에요.


형제들이여, 너의 죄는 희대의 형식이어서
제게 돌을 던질 자격을 드리기로 합니다.

커다란 손에는 잘 벼린 말씀과 한 줌의 인간들.
내 직유의 전장에는 방패 같은 톨레랑스!

 

 

*시집/ 대자연과 세계적인 슬픔/ 파란출판

 

 

 

 

 

 

여름성경학교 - 박민혁


지난밤 여체를 더듬은 손으로 어린이들의 볼을 쓰다듬는다.

근친의 애인은 생사람 같다.
생불(生佛) 같다.

나의 목자요,
하나님 슬하의 배다른 형제.

얘야, 괜찮다.
사랑은 대부분의 방식이 이단이지.

입맛에 맞는 천국을 가면 된다.

설령,
집념의 병리와 믿음의 병리가 싸우고 있었다.

입덧하는 여름,
죄의 맛을 모르는 어린이들은 물놀이를 위해 거리낌 없이 옷을 벗는다.

나는 문란하므로 애인 앞에서는 죄가 없다.

내게 유소년기를 보여준 이들이 자신과 닮은 아이들을 하나씩 안고 입장한다.

내 부주의로 눈두덩이 찢어진 어린아이가 나를 보고 바보처럼 웃고 있다. 이제 나는 그런 것이 신의 표정이라고 착각할 만큼 어리석지는 않다.

우울이 지나친 자는 온몸이 흉기다.

과년한 슬픔 몇 개를 회당에 몰래 버리고 오던 길. 내가 모범 교사로 추천되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흐트러진 정적을 수습하다가 징그럽게 웃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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