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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을 배달하는 퀵서비스 맨 - 주창윤

추석을 배달하는 퀵서비스 맨 - 주창윤 배달이 밀리는 추석이다. 퀵서비스 맨이 갈비 세트와 특상(特上) 나주배 상자와 양주병을 가득 싣고 질주한다. 그의 어깨 너머 추석 보름달이 조금씩 조금씩 아래로 내려와 짓누른다. 특상 나주배 같은 달의 무게가 중심을 잃게 만들었나? 사거리에서 넘어진 오토바이 바퀴는 계속해서 헛돌고 쓰러진 퀵서비스 맨은 일어나지 못한다. 깨진 양주병에서 터진 보름달이 흘러내려 아스팔트를 적신다. 달은 그렇게 노랗게 흘러내리고 있다. *시집/ 안드로메다로 가는 배민 라이더/ 한국문연 그리운 은하수 목욕탕 - 주창윤 중계동 한화꿈에그린 아파트 정문에서 오른쪽으로 길게 걸어가면 빌라와 주택들 사이 은하수 목욕탕이 있다. 몇 달 만에 갔더니 사라졌다. 격포에 가서, 밀물과 썰물이 만들어낸 ..

한줄 詩 2021.09.22

바람의 변주 - 하외숙

바람의 변주 - 하외숙 먼저 말 걸어오는 바람을 좋아하나요? 뿌리도 없는 것들이 어찌 천 년을 사는지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고 길들여지지도 않는 수많은 바람의 길 신발도 신지 않은 채 그림자로 따라다니다 어두운 밤길 달리면서도 멈출 수 없는 태풍처럼 심장을 관통하고 떠나는 바람의 등 창문을 열고 구월의 달력을 넘기자 이해할 수도 설명할 수도 없는 펄럭임 굳은 언약도 무의미해지는 순간, 바람이라 했네 깊이를 알 수 없는 숨겨진 비밀은 한 순간이었던가 수시로 베갯머리 파고드는 달뜬 몸살은 풍로의 바람처럼 활활 타올라 당신이 아니었다면 꽃을 피우지 못했을 것을 꿈결에 일어나 흐느끼는 바람을 본 적 있나요? *시집/ 그녀의 머릿속은 자주 그믐이었다/ 시와반시 바람의 가출 - 하외숙 ​ 며칠 잠잠한가 하더니 바람..

한줄 詩 2021.09.22

아프면 보이는 것들 - 의료인류학연구회

한 달 전부터 올 추석은 아무데도 가지 않고 집에 머물기로 작정했다. 코로나로 꼼짝을 하지 못한 작년 추석과 마찬가지다. 확진자 숫자가 작년보다 훨씬 많은데도 피부로 느끼는 경각심은 되레 느슨해졌다. 걸리고 안 걸리고는 하늘의 뜻이니 대충 살지 웬 호들갑이냐고 할지 모르나 그래도 안 걸리기 위해서는 가능한 접촉을 줄이는 것이 최상이다. 일찌감치 책을 읽으며 집에 머물기로 결정한 이유다. 이전부터 읽고 싶었던 책 목록에서 몇 권의 시집과 단행본이 쏟아져 나온다. 몽땅 주문하고 싶으나 그래도 골라내야 한다. , 오늘 종일 이 책을 읽었다. 나는 이 연휴에 맞는 편안한 휴식을 본래 내것이 아닌 누군가에게 뺏은 거라고 생각한다. 내가 하나 더 먹으면 누군가는 굶어야 하고 내가 하나 더 버리면 누군가의 고통으로 ..

네줄 冊 2021.09.19

자화상 - 황중하

자화상 - 황중하 나는 불행했고 불행하고 또 불행하다. 내가 그린 나의 얼굴은 아무래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 여러 겹 덧대어 그린 불안한 선들과 우울한 형태들 ​ 내가 믿고 싶은 진실은 언제나 스케치의 뒷면으로 사라진다. ​ 어쩌면 나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을 황홀한 진실을 찾아 헤맸는지도 모른다. ​ 세상은 나를 향해 열려 있지만 늘 깜깜했다. ​ 어둠 속에 추락한다. 상처 입은 채 깨어난다. ​ 참을 수 없는 통증을 느끼며 처음으로 자세히 들여다본 도화지 속 나의 얼굴 ​ 그것은 내가 그린 타인의 거짓말 처음부터 나의 불행은 나의 것이 아니었다 *시집/ 나는 아직 당신을 처리중입니다/ 문학의전당 빗방울 - 황중하 어차피 이번 생은 틀려먹었다는 생각 칼날 같은 빗방울은 내리고 나의 뇌리에 뚫고 들..

한줄 詩 2021.09.19

오래 만진 슬픔 - 이문재

오래 만진 슬픔 - 이문재 이 슬픔은 오래 만졌다 지갑처럼 가슴에 지니고 다녀 따뜻하기까지 하다 제자리에 다 들어가 있다 이 불행 또한 오래되었다 반지처럼 손가락에 끼고 있어 어떤 때에는 표정이 있는 듯하다 반짝일 때도 있다 손때가 묻으면 낯선 것들 불편한 것들도 남의 것들 멀리 있는 것들도 다 내 것 문밖에 벗어놓은 구두가 내 것이듯 갑자기 찾아온 이 고통도 오래 매만져야겠다 주머니에 넣고 손에 익을 때까지 각진 모서리 닳아 없어질 때까지 그리하여 마음 안에 한 자리 차지할 때까지 이 괴로움 오래 다듬어야겠다 그렇지 아니한가 우리를 힘들게 한 것들이 우리의 힘을 빠지게 한 것들이 어느덧 우리의 힘이 되지 않았는가 *시집/ 혼자의 넓이/ 창비 달의 백서 1 - 이문재 -그래서 달은 둥글어진다 지금 저기 ..

한줄 詩 2021.09.19

최근에도 나는 사람이다 - 안태현 시집

안태현 시인이 세 번째 시집을 냈다. 2011년에 으로 등단했으니 올해 딱 10년 차다. 2015년에 첫 시집을 내고 세 번째 시집이니 부지런히 시를 쓰는 사람이다. 그렇다고 시가 느슨하거나 허술한 것 없이 탄탄하고 어려운 낱말 없이도 긴 울림을 준다. 한 사람에 꽂히면 단물이 빠질 때까지 주구장창 만나는 편인데 시인도 마찬가지다. 이 시인에게 제대로 꽂혀 나오는 시집마다 집중해서 읽는다. 발로 쓰든 엉덩이로 쓰든 가슴으로 쓰든 간에 시에는 그 시인의 정체성이 담겨 있다. 이번 시집에서는 시인의 사춘기 적 체험을 발견할 수 있다. 연작시로 세 편씩 실린 과 이다. 열 여섯 살에 취업한 영등포 지하다방은 시인의 첫 직장이었다. 바람 한 점, 햇빛 한 점 없는 이곳을 시인은 적멸보궁이라 칭한다. 김 양이나 ..

네줄 冊 2021.09.18

저문 들녘의 꽃들을 위하여 - 박남원

저문 들녘의 꽃들을 위하여 - 박남원 꽃들이 핀 저문 들녘에 서면 바람은 시든 추억의 재가 되어 돌아온다. 젊은 날 꿈을 찾아 멀리 날아갔던 새들은 기억조차 가물거리고 나는 저문 들녘의 꽃길을 걷는다. 대낮부터 햇빛과 흰 구름과 따듯한 공기에 한껏 향연을 베풀다가는 어둠이 온 무렵에서야 겨우 꽃들은 자신의 길을 내게 열어주었다. 그리고 나는 그 손짓을 받아들인다. 아쩌면 지금 저 꽃들은 나보다 더 슬픈 기억의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 기억의 마을 귀퉁이에선 언제나 푸른 꿈들이 어둠 속에 저물어가고 한 모금 목마름의 물조차 야속했던 혹은 운명과도 같은 시간들. 그래서 꽃은 미처 꽃이 되지 못한 것들에게 조그만 위로의 말을 전하는 것이다. 세상에 환한 것들은 생을 살아오는 동안 한 번쯤 아픈 ..

한줄 詩 2021.09.18

물망초 - 윤의섭

물망초 - 윤의섭 제자리에 떠 있는 새는 바람과 맞서는 중이다 다른 항로는 없다 새는 지금 충분히 무겁다 꽃말은 나를 잊지 마세요입니다 물망초 우리 일생이 그런 거죠 안 그러면 얼마나 서럽겠습니까 얘기를 들으면서 한참을 머물렀다 죽음에 가까워질수록 나에 대한 기억이 쌓이는 건지 희미해지는 건지 언제부터 이 산책을 나섰는지 떠오르지 않아 깨고 나면 잊힐 게 분명한 생시였다 지난 모든 순간들이 한꺼번에 펼쳐졌으므로 구릉으로부터 바람이 밀려온다 나무들의 지붕이 쓸리고 뒤따라 노을구름과의 꼬리가 흩어진다 걷는 게 아니라 통과하는 것이다 이 생이란 지워지지 않은 네 생각들로 가볍지 않다 *시집/ 내가 다가가도 너는 켜지지 않았다/ 현대시학사 애사 - 윤의섭 내가 꾸는 가장 긴 꿈은 너와의 일초에 대해서일 것이다 ..

한줄 詩 2021.09.18

오늘의 안부 - 김가령

오늘의 안부 - 김가령 전봇대 뒤쪽 얼었던 금 간 벽이 열린다 노릿한 오후가 가만 가만 속살을 드러낸다 몇 개의 본색이 톡 톡톡, 터진다 나를 향해 건너온다 너무 많은 노랑들이 포개져 틈에서 바깥으로 새로 돋은 꽃잎들이 안쪽을 들키고 싶은 마음에 젖는다 벌들이 꽃 뒤로 사라진다 쉿, 이별하지 못하겠다 한겨울에 핀 개나리처럼 추웠던 날이 있었지 오랫동안 싹을 틔우지 못하고 사소한 입술마저 지우고 냉정하게 괜찮은 척, 해야만 했지 누군가에게 수신 거부된 사람처럼 나는 밖으로 나서지 못하는데 단 한 번도 노랑을 배반해본 적 없는 개나리는 확고하다 봄까진 아프지 말라고 떼로 피는 것 같다 오늘부터 안부는 온화하고 간지럼은 부드럽다 *시집/ 너에게 붙여준 꽃말은 미혹이었다/ 문학의전당 너에게 붙여준 꽃말은 미혹이..

한줄 詩 2021.09.17

매미, 생은 이제 아름다웠다 - 유기택

매미, 생은 이제 아름다웠다 - 유기택 드러눕고 싶은 생이 있다 일곱 해를 기다려, 일곱 날을 울었다 일곱의 전생을 건너와 다 살았다 자그마치 염천 칠월 한길로 칠성판을 깔았다 타인의 낯선 죽음에 쉽게 동의했다 산 자들의 슬픔을 장사 지냈던 것 그럴 리 없는 단발 총소리가 들렸다 총소리가 날아간 쪽으로 적막한 구멍이 하나 길게 생겨났다 고요를 아물린 정적 빙하 속에 갇힌 공기 한 방울 젊은 나이에 죽은 형은 이제 나보다 어리다 벽을 아무리 두드려도 안이 안 들리는 좀 눕고 싶은 안이 있다 태생이 우발적일 수 없는 총을 오래전부터 손잡이를 아름다운 상아로 장식한 쓸쓸한 권총 한 자루를 가지고 싶었다 *시집/ 사는 게 다 시지/ 달아실 야화 - 유기택 새벽 한 시, 옆집 시멘트 담장 아래서 사랑 하나가 끝나..

한줄 詩 2021.09.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