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삼대 - 이문재

마루안 2021. 9. 7. 19:42

 

 

삼대 - 이문재
-미래를 미래에게


할아버지는 낙타를 타고 아버지는 자동차를 탔다
아들은 지금 비행기를 탄다 하지만 손자는 다시 낙타를 탈 것이다
석유가 많이 나는 먼 사막의 이야기다

아버지는 다 만들어서 썼지만 아들인 나는 다 사다 쓴다
내 아들은 내가 번 돈으로 다 사서 쓰다 말고 다 갖다 버린다
내 아들의 아들은 다시 다 만들어서 써야 할 것이다
지금 여기 우리 이야기다

모래언덕의 아버지와 우리 아버지가 크게 다르지 않다
중동에서 석유를 파내는 것과 황해 바다를 메우는 것이 다르지 않다
덕분에 사막의 아들딸은 비행기를 타고 우리의 아들딸도 차를 몰지만

비행기를 타고 자동차를 모는 아들딸의 잘못이 아니다
전적으로 아버지의 잘못이다 아시아 아메리카 유럽 오스트레일리아
모든 아버지가 아들딸의 미래를 끊임없이 훔쳐온 것이다
청년의 미래를 보란 듯이 줄기차게 착복해온 것이다

젊은이의 미래가 그래서 사라져버렸다
그래서 청소년이 방 안에 틀어박히고 젊은이가 연애도 못한다
다름 아닌 아버지에게 미래를 빼앗긴 다 자란 아들딸들이
지구 표면 곳곳에서 망연자실해하고 있다

가족이 탄생하고 도시가 번창한 이래
아버지가 이런 방식으로 자기 자식을 착취한 적은 없었다
아버지가 가진 것은 죄다 불법이다 죄다 장물이다
아버지가 가진 것이 많을수록 죄의 목록이 길어지고
아버지가 누리는 것이 많을수록 형량이 높아진다

미래를 미래에게 돌려줘야 한다
아버지가 미래를 돌려줘야 아들딸이 지금과 다른 미래를 꿈꾼다
지금과 다른 미래를 준비해야 아들딸과 아들딸의 아들딸이
다시 다 만들어 쓰고 다 키워서 먹어야 하는 지금과 전혀 다른 세상에서
서로 떳떳하고 스스로 아름다울 것이다
그때쯤이면 누구도 함부로 미래에 손을 대지 않을 것이다

 

*시집/ 혼자의 넓이/ 창비

 

 

 

 

 

 

녹슬었다 - 이문재


고장이 났다
안쪽에 녹이 잔뜩 슬었다
연결 부위가 다 뻑뻑해졌다
눈도 어두침침하고
호흡도 많이 샌다
무엇보다 다른 사람을 알아보지 못한다

탈이 난 것이다
몸과 마음이 따로 놀고
기억력이 상상력으로 승화되지 않으며
감정을 이입하지 못하고
무엇보다 자존감
자신감이 현저하게 떨어졌다

탈진한 것이다
돈에 눈이 어두워진 것이다
이념의 껍데기에 걸려 넘어진 것이다
무기력이 분노를 부둥켜안지 않아서
기억이 미래를 움켜쥐지 않아서 탈이 난 것이다
꿈이 따뜻한 이야기를 빚어내지 못해서
우리가 좋은 장소를 만들어내지 못해서
녹슬어버린 것이다

너 민주주의 말이다

아니다
고장나 녹이 슨 것은
자신 있게 속물이 된 우리들이다
탈이 났는데도 아프지 않은 우리 개인들
경제적으로 성난 동물이 된 우리 소비자들
세련되게 나약해진 우리 혈기왕성한 괴물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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