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늦여름 후박나무 아래서 - 허문태

마루안 2021. 9. 7. 19:35

 

 

늦여름 후박나무 아래서 - 허문태

 

 

늦여름 후박나무 아래 돗자리를 펴고 누웠다.

'오르가즘이 끝난 여름'

늘어진 오후가 팽팽히 힘을 모은다.

하도 오래 전 일이라 오르가즘인지 오르가슴인지.

그 '오르가즘이 끝난 여름'

앞뒤로 몇 줄 문장을 만들어 끌고 가면 시가 될 것 같다.

오르가즘에 비유로 꽁꽁 묶어 앞으로 끌어 봐도

여름에 메타포를 걸어 뒤로 당겨 봐도 꼼짝하지 않는다.

 

따끔!

손보다 몸이 먼저 벌떡 일어났다.

티끌만한 개미가 발목을 물었다.

날 제 먹이로 생각하고 끌고 갈 모양이다.

무모함도 모르는 티끌 같은 녀석.

 

어!

개미 녀석 콧노래를 부르며 나를 끌고 간다.

옆에 있는 친구와 깔깔거리며 제 굴로 끌고 간다.

까맣게 탄 티끌만 한 녀석

여름의 절정에서 무엇을 느꼈기에 저리 힘이 세졌을까.

친구들과 깔깔거리며 나를 끌고 간다.

늦여름, 질질 끌려간다.

 

 

*시집/ 배롱나무꽃이 까르르/ 리토피아

 

 

 

 

 

 

노을 - 허문태 


노을은 사랑을 정산하라고 내미는 청구서다.
바닷가를 걸으며 불쑥 그녀가 한 말이다.

다짜고짜 사랑을 정산하라고 하면
늘 하던 대로 조금만 기다리라고 할 수밖에,
다짜고짜 노을이 되라고 하면
막무가내로 잠깐만 기다리라고 할 수밖에,

가을날 들녘에서 돌아오시는 아버지는 빈 지게에 노을만 가득 지고 오셨다.
한가득 지고 온 노을을 부엌에 쏟아 놓으면 저녁 밥상에도 노을만 그릇마다 가득했다.

아버지의 노을 한 방울이 뚝 코끝에 떨어진다.

아버지의 노을은 되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살았는데

이제 그만 일몰이 아닌 노을이 되라 하면
내 노을은 푸르딩딩 할까 거무죽죽 할까.

조금이라도 붉은 빛이 돌기는 할까.


바닷가에 앉아 그 노을 생각이 깊다.
이름 모를 검은 새 한 마리 노을 속을 날아간다.
노을에서 진한 지폐 냄새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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