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돋보기의 시간 - 정덕재

돋보기의 시간 - 정덕재 온라인 서점에서 날아온 상자를 열기 전에 칼이나 가위를 찾아야 하고 추리소설에 어울리는 목차가 제대로 되어 있는지 돋보기를 찾아야 한다 테레비를 보기 위해 리모컨을 찾는 시간 자동차를 타려고 열쇠를 찾는 시간 전화를 걸기 위해 휴대폰을 찾는 시간 모든 사물과 일체가 된 시간을 모아 놓고 습관과 게으름과 욕망 사이에서 잘못의 경중을 따지기 전에 목차를 읽는 돋보기는 찾아야 한다 오래전 살인사건의 혈흔을 찾던 돋보기는 낡아졌고 카펫 위 엉뚱한 머리카락을 찾다가 한가한 빛으로 들어온 오목렌즈 놀이로 태워 버린다 보청기는 없더라도 상자 밖으로 새어 나오는 파열음을 추적하기 위해 돋보기는 찾아야 한다 거기에 살해당한 문자들이 묻어 있을 것이다 *시집/ 치약을 마중 나온 칫솔/ 걷는사람 5..

한줄 詩 2022.05.08

무렵 - 김화연

무렵 - 김화연 무렵이란 말 좋지 마지못해 기울어진 즈음, 자칫 잘못하면 미끄러지거나 빨려 들어가기 쉽지 모든 것을 두고 온 곳이거나 모든 것을 가져다 놓을 수 있는 곳 시소처럼 무거운 것은 뜨고 가벼운 것은 내려앉는 그런 무렵 꽃들이 무더기로 피어도 좋고 붉게 하교하던 노을이나 제철 꽃들의 기억을 모두가 나누어 갖고 있는 그 무렵들 하루에도 몇 번 있고 한 달에도, 몇십 번 있는 움직이는 무렵 아득한 핑계들을 모아도 좋은 그립다고 말해도 좋고 지긋지긋하다고 진저리를 치기도 좋은 해 질 녘 만나면 추적추적 내리는 홑겹의 비를 덮고 낮잠을 자도 좋은 그런 저런 무렵들 어디까지 가는 스산함일까 가을 들녘을 아지랑이처럼 걸어와 흰 머리카락을 벗기다 갈 이런저런 소문으로 마무리되는 무렵들 비스듬한 날씨나 특별한..

한줄 詩 2022.05.08

슬기로운 좌파 생활 - 우석훈

가뜩이나 편 가르기가 심한 시절에 이런 책이 나왔을까 싶지만 참 좋은 책이다. 너네 쪽에서 먼저 편을 갈랐다고 책임을 떠넘기지만 사람 사는 세상에 편 가르기는 있기 마련이다. 사람 셋만 모여도 의견 일치가 쉽지 않은데 5천만이 넘는 나라에서 편 가르기는 생길 수밖에 없다. 왼쪽 오른쪽뿐 아니라 강남북, 동서로 갈려 있는 게 현실 아닌가. 이런 편 가르기를 무조건 나쁘게만 볼 수 없다. 단지 편이 다르다고 반대만 할 게 아니라 서로 인정할 건 인정하고 싸우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나는 절대 악플을 달지 않는다. 그 악플이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지만 연이어 달리는 대댓글로 말꼬리 잡기로 변하기 때문이다. 우석훈의 책은 대부분 읽는다. 우선 이라는 책 제목이 마음에 든다. 이 사람 특유의 맛깔스런 ..

네줄 冊 2022.05.08

오늘이라는 이름 - 이기철

오늘이라는 이름 - 이기철 밀물이 안 올까 봐 썰물이 소리 내어 우는 건 아니다 해 질 녘 동해 바다는 모래톱까지 달려와서 운다 바다는 지구의 끝인가 시작인가, 물으며 내 안에 와서 금을 긋던 사람들 흉금 안쪽에 파란 색칠을 하던 사람들도 묻다가 홀연히 자취를 감추었다 그 블랙홀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을 사람들은 추억이라 부르지만 나는 속도라 부른다 추억의 몽리구역까지 갔다 오는 데는 실로 한생이 걸린다 나는 인간의 시간을 걸어 여기까지 왔다 나는 농막에도 앉고 테트라포드에도 앉아 별점 치다 한 세기를 놓쳐 버렸다 놓친 세기는 역사박물관으로 간다 오늘은 모래의 밥을 먹으며 타고 남은 속마음을 바느질한다 그러나 어쩔 수 없다 오늘의 슬픔을 어디다 잠가 두면 새어 나가지 않을까 생각다가 갓 핀 잠자리난초를..

한줄 詩 2022.05.07

열등생 - 박용하

열등생 - 박용하 상처받는 자들 그들도 달빛을 받는다 그 달빛으로 자신만 알고 있는 나무 곁에 서서 쫓겨난 집과 학교를 바라보고 있는 그 오랜 묵시의 동굴을 따라 지구 반대에서 태양을 건져 올린다 천천히 자신의 이름이 지워질 때까지 천천히 자신의 주소가 소나무 숲일 때까지 어떤 조롱이 그를 더 멀리까지 밤길을 굴리게 한다 어떤 질타가 그를 더 멀리까지 빗방울의 밤들을 꿈 밝히게 한다 상처받는 자들 그들도 달빛을 받는다 그 달빛으로 새들도 깃들이지 않는 벌판의 헛간에서 죽음을 나열하는 뒤죽박죽의 나뭇잎들을 탓하지 않으며 기억의 먼지들을, 모멸을, 생의 푸른 상처들을 불타는 물로 자존의 복수를 방전한다 스스로 구름의 안과 밖을 넘나드는 번개일 때까지 얼마나 많은 비의 눈빛들을 저 하늘의 달과 별 속에 풀어놓..

한줄 詩 2022.05.07

편지 - 박지영

편지 - 박지영 딸아, 엄마가 보듬고 산 25년의 결혼 생활은 벼락 맞은 감태나무 같았다 초로의 노인만 보면 무심하게 타고 내리는 버스에서도 가던 노선을 잃고 따라내려 킁킁거리며 마냥 눈물이 났단다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아림이가 어느덧 밑동이 되어 울고 있었다 하루 치의 노동이 새벽에 이르러 멈출 때, 근근이 이어지는 속울음이 어깨 깃을 흔들고 떠나간 사람이 살아남은 사람의 행간을 더듬을 때 날짐승처럼 꺽꺽거리며 출렁이는 어둠에 몸을 숨기고 싶었다 아들아, 꿈처럼 산 오늘이 너희가 밑동이 될 것이니 살아 있는 동안 남은 너희들이 살아갈 날에 지팡이가 될 것이니 남은 노동은 얼마나 지난한 것이냐 하루 치의 노동에 한 스푼의 감사함으로 구멍 난 오늘을 꿰매며 살아라 인생이 벼락처럼 때리더라도 연수목이 되어라 ..

한줄 詩 2022.05.06

오일장 나이키 - 이우근

오일장 나이키 - 이우근 장세(場稅)를 못 낼 형편이라 외곽 담벼락 아래, 여기는 햇살이 참 따끈해요 그냥 모여 질끈 징검다리 놓아요 종일 기다려 몇 단 판 봄나물 파장 무렵, 눈길 끄는 저 신발 기술력이 좀 떨어진다고 나쁜 신발은 아니라네요 식구들 거 다 챙겨요 서울 것들, 눈여겨보지도 않을 테지만 임대료 유통마진 브랜드파워 세금까지 후려치고도 거뜬하다네요 서민경제 기여한다고도 하고, 그래서 십 리도 못 가 발병 나더라도 가야할 길, 조여매고 가고 싶어요 꼭 가요 이류(二流)라도 일류 흉내 내면서 결국엔 가장 하류가 되면 마음 편할 거라 생각해요 나는 가당찮은 희망을 꿈꾸지 않아요 옆 난전에서 만 원 석 장 트렁크 팬티도 마저 사서 입고 거침없이 달려 볼까나. *시집/ 빛 바른 외곽/ 도서출판 선 묵호..

한줄 詩 2022.05.06

악을 쓰며 짖는 개에게 - 김명기

악을 쓰며 짖는 개에게 - 김명기 나도 살자고 한 일이라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않겠다 어디 갈 곳이라도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돌아갈 수는 없다 기억하는 것을 지우고 숙명이란 말을 받아들여야 한다 어떤 관계는 참 비통하지 버리고 돌아선 사람은 아무렇지도 않겠지만 어디선가 속죄를 대신 할 사람이 너를 찾아다니고 있을지도 모른다 벽에 머리를 찧으며 끊임없이 왜냐고 묻고 있지만 대답해 줄 수가 없다 공손한 너를 데리고 저녁 한때를 걸어가던 사람이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 오직 오늘만은 살아야겠다고 발버둥 치는 우리는 같은 족속일지도 모른다 어느 편에도 서지 못하는 아나키처럼 서로의 슬픔을 막아서는 중이다 더 이상 맨발인 너를 위해 해 줄 게 없구나 곧 체념이 친구처럼 옆에 와 누울 것이다 쏟아붓는 기원과 비통은 회랑..

한줄 詩 2022.05.03

가끔 구름 많음 오후 한때 소나기 - 송병호

가끔 구름 많음 오후 한때 소나기 - 송병호 일기예보에 벌이나 나비가 관여할 수 있을까? 휴대전화나 비밀번호는 암호화되어 있는데 예보는 예보와 상관없이 모호한 자리를 암호화한다 점친다는 것. 맞으면 좋고 안 맞아도 그만이지만 심기가 불편하다 밑줄 친 그래프에 마침표가 없는 부호는 끝이 아닌 꽃의 농담 같다 얇은 외출을 만지작거리는 비구름의 속삭임 햇볕에 구운 바삭한 찻잎 부각을 찻잔에 올린다 안개알갱이가 이동하는 후텁한 습濕 소나기가 오려나 믿었던 외출이 젖어 진정할 수밖에 없었던 냉정, 자기 결여는 증상을 짚지만 꼬리 잘린 도마뱀의 행적이 묘연한 추측성 요행으로 점쳐보는 배후, 뜻밖에 날숨을 고르듯 제2막을 예보한다 구멍 숭숭한 나뭇잎을 가로지른 자벌레 여전히 무엇을 재고 있다 *시집/ 괄호는 다음을 ..

한줄 詩 2022.05.03

저녁 식탁에서 지구를 생각하다 - 제시카 판조

아파트 값 상승 같은 가정 경제에 도움은 안 되지만 지구를 생각하는 삶에는 꼭 필요한 책이다. 라는 책 제목에서 무슨 내용일지 금방 들어온다. 말 그대로 내가 먹는 음식이 환경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알려주고 있다. 평소 관심이 많던 분야라 단숨에 읽었다. 듣기 좋은 꽃 노래도 열 번 들으면 질린다지만 환경 문제는 백 번을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당장 편리함만 쫓다 훗날 후회한들 무슨 소용인가. 저자는 자기가 마주하는 밥상의 식재료가 어떤 과정을 거쳐 여기까지 왔는지를 묻게 만든다. 가령 이런 문장이다. . 이 얼마나 명징하게 박히는 글인가. 자기 텃밭에서 기른 농산물로 식사를 해결하면 가장 좋은 방법이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렇지만 웬만하면 가공식품보다 지역에서 나는 재철 채소 위주의 식사를 하..

네줄 冊 2022.05.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