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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 이력서 - 서화성

봄날 이력서 - 서화성 봄날은 어디서부터 시작할까 내 고향은 어느 먼지가 뿌연 두메산골인지 무소식을 짊어진 우체부가 사라지는 어느 골목길인지 서너 달 걸려 소독차 꽁무니를 쫓아갔던 그날부터일까 아래 이장집 굴뚝에서 연기가 새어 나오는 저녁 무렵인지 고구마를 굽는다며 얼굴까지 타버린 그날인지 막차가 떠난 밤길을 걸어서 왔던 어느 논두렁인지 건넛마을에 마실 간 엄마가 돌아왔던 달빛부터일까 까까머리에 가슴을 움켜쥐고 여학교를 지나갔던 시절인지 모캣불을 피우며 떨리던 손을 잡았던 그날인지 읍내 제일 큰 빵집에서 미팅한 오월부터 시작일까 이브 날에 걸었던 어느 키가 커버린 철둑길인지 코스모스가 뜬눈으로 설레게 한 어느 가을날인지 밤새 새끼손가락을 걸었던 첫눈이 내린 산동네인지 답장을 기다리며 꾹꾹 눌러 쓴 밤편지..

한줄 詩 2022.05.02

슬픈 것은 우리가 헤어졌기 때문이 아니라 헤어진 방식 때문 - 류시화

슬픈 것은 우리가 헤어졌기 때문이 아니라 헤어진 방식 때문 - 류시화 ​ 목련꽃 필 때쯤 이따금 혼잣말하네 슬픈 것은 우리가 헤어졌기 때문이 아니라 헤어진 방식 때문이라고 내가 원하는 것은 우리가 다시 만나는 것이 아니라 다시 만나 다른 방식으로 헤어지는 것이라고 그것만이 옛사랑을 구원할 수 있다고 *시집/ 꽃샘바람에 흔들린다면 너는 꽃/ 수오서재 그런 사람 - 류시화 봄이면 꽃마다 찾아가 칭찬해 주는 사람 남모르는 상처 입었어도 어투에 가시가 박혀 있지 않은 사람 숨결과 웃음이 잇닿아 있는 사람 자신이 아픔이면서 그 아픔의 치료제임을 아는 사람 이따금 방문하는 슬픔 맞아들이되 기쁨의 촉수 부러뜨리지 않는 사람 한때 부서져서 온전해질 수 있게 된 사람 사탕수수처럼 심이 거칠어도 존재 어느 층에 단맛을 간..

한줄 詩 2022.05.02

슬픔을 삼키는 계단 - 강시현

슬픔을 삼키는 계단 - 강시현 볼 때마다 주름이 더 패어 있는 시간의 이마를 가만히 짚어 봅니다 봄날의 주름은 청보리밭 이랑을 안고 산들바람에 일렁입니다 파란 허공의 주름은 응고되어서 안타까운 연애 같습니다 아픔을 느끼는 주름은 살아서 숨을 쉽니다 가시가 뱉어 내는 붉은 줄장미의 화원을 거닐어 보셨습니까 평지의 중심에서 태어나 꼭대기로 가는 길을 내주었으나 흙 묻은 시간의 가시가 가슴을 깊숙이 찔러 신음을 삼키던 높이의 풍경은 어떻던가요 코끼리가 흰 다리로 지키는 따뜻한 사원을 지나가 보셨습니까 안온의 자궁에서 태어나 평온의 일상을 꿈꾸었지만 기다림의 과녁에 꽂혀 바닥의 웅장한 탯줄을 잘라 내던 딱딱한 충고의 혓바닥은 또 어떻던가요 슬픔을 삼키는 계단은 삼우제의 봉분처럼 살아 있습니다 스스로 목숨을 거두..

한줄 詩 2022.05.02

바람은 너의 소멸로부터 오고 - 박두규

바람은 너의 소멸로부터 오고 - 박두규 바람이 분다 모든 걸 쓸고 갈 거대한 해일을 몰고 그렇게 두려움은 언제나 죽음으로부터 오지만 그 죽음의 두려움을 넘을 수 있는 건 스스로를 버려야만 하는 것 거대한 바람이 불어 오랜 억압과 폭력을 쓸어낼 수 있는 건 모두를 죽음으로부터 해방시킬 수 있는 건 나 하나 먼저 스스로를 버려야만 하는 것 그토록 바람은 나의 소멸로부터 오고 바람은 멈추는 순간 바람이 아니니 어디론가 끝내 흐르는 것이며 누군가에 이르러 변화가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게 미얀마의 바람은 미얀마의 죽음으로부터 불기 시작했다 불타는 도시 양곤의 아스팔트에 쏟아낸 그대들의 피가 이젠 지구별 모든 사람들의 피가 되었다 어느 날 불어오는 한 가닥 바람처럼 그렇게 그대들의 죽음은 깃털처럼 가벼워졌..

한줄 詩 2022.05.01

희망자원 앞에서 - 박숙경

희망자원 앞에서 - 박숙경 사라진 별을 생각하느라 잠을 놓쳤다면 하현달은 불면의 공범 흘러내리는 하품을 손수레에 앉혀 막다른 골목 기웃거리면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간 한 줌의 희망을 찾아낼 수 있을까? 쓸모없어 버려진 것들과 쓸모에 대해 말할 수 없는 것들과 펴진 것은 주름잡고 주름진 것은 곧잘 폈을 낡은 이야기와 한때는 최신형으로 잘나갔을 과거의 슬픈 노래와 부서지고 닳은 것들의 최후진술들이 닫힌 철문 앞에 모였다 경멸과 연민과 곱지 않은 시선을 따돌리고 반복적으로 굽신거린 허리가 발굴한 고물과 처음부터 고물로 태어난 고물과 알면 돈이 되는 고물과 기타 등등의 잡동사니들과 불법과 합법 사이의 아슬아슬한 편견들 빠진 발톱처럼 다시 태어나는 것이 희망이라고 했나요? 거친 손바닥에 쥐어진 몇 닢의 지전을 꿀꺽..

한줄 詩 2022.05.01

닻 - 우대식

닻 - 우대식 참 많은 문신을 보았지만 문신이란 오직 닻 하나 하급선원으로 떠돌았을 사내의 팔뚝에 겨우 매달린 그것, 끝내 정주할 수 없다는 예감으로 문신은 희미해진다 불 꺼진 항구에 수없이 닻을 내렸을 테지만 닳아빠진 그것을 슬그머니 건져 올리는 새벽 남쪽의 별들은 사내의 등을 내려다본다 닻 위에 별을 하나 그려놓아도 좋겠지만 그것은 지고지순이 아니다 저 지고지순은 언제쯤 희미해지는가 다 닳은 지고지순을 안고 한평생을 살아야 하는가 항구에 배를 댈 때 별의 슬픔과 닻의 슬픔이 슬픔을 참아가며 희미하게 미소 짓는, 지고이네르 지고지순 지고이네르의 지고지순 닻 *시집/ 베두인의 물방울/ 여우난골 봄날은 간다 - 우대식 허무의 절창 봄날은 간다 그렇게 사라져야지 꽃잎이 물에 떠서 사라지듯 알뜰한 당신이나 생..

한줄 詩 2022.04.30

가을, 겨울, 봄을 지나 여름으로 - 박찬호

가을, 겨울, 봄을 지나 여름으로 - 박찬호 행복한가 가을바람이 서늘한 물음을 보냈다 알고 묻는 것일까 돌아보면 아무것도 없어 잠시 멍하니 있는 내게 행복이 무엇인지 알고는 있는가 묻는다 혹시나 그리운가 창밖 흰 눈은 저리도 예쁜데 진즉 돌아왔어야 할 그이는 보이지 않고 되돌아보니 지난했던 그 한때를 두리번거리며 배회하는 나를 싸한 겨울바람은 시도 때도 없이 문득문득 몰려와 시린 내 귓볼을 때리며 묻는다 그래서 외로운가 때 이른 봄 벚꽃이 바람에 떨어지다 내 발아래 멈춰서 진지하게 묻는다 나는 단지 네가 외롭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 것뿐인데 내가 그리도 절박해 보였냐고 내게 네게 되묻는다 정말로 두려운가 여름 진한 햇볕 아래 잠시 묻어 두었던 외로움이 들릴 듯 말 듯 속삭인다 외로움은 종종 그리움..

한줄 詩 2022.04.30

봄밤 - 김정미

봄밤 - 김정미 까마귀 부리는 그날 운세였다 환풍기 날개 깊숙이 붉은 패를 밀어 넣고 아랑곳하지 않는 제발과 잠시 불타버렸다 불탄 순간은 홀로 어두워지다 얼룩을 남기며 깊어지는 중이었다 죽은 새를 죽은 패로 자꾸만 잘못 발음했다 비 맞은 날이면 점괘에 젖지 않는 오늘을 두꺼운 전집으로 갖고 싶었다 무너진 바닥을 믿지 않는 편이어서 고요한 모서리들은 손에서 미끄러지다 고딕의 자세를 놓치곤 했다 그을린 멈춘 새를 마지막까지 열지 않았다 퉁퉁 불은 손금을 물고 오는 부리를 오독할 때마다 뒤집어진 밑장 하나 본 것도 같다 검은 싸리나무를 건너오는 내 안에 나를 만날 때마다 검은 재가 자꾸 묻어 있었다 울면 아무래도 나쁜 패를 손에 쥐는 일이어서 조용하게 밥을 지었다 죽은 쥐를 끌고 가는 그림자를 보았다 나를 응..

한줄 詩 2022.04.29

일생 한 일 - 장시우

일생 한 일 - 장시우 개구리가 알을 슬고 간 무논 영문도 모르고 알에서 깬 올챙이는 고여 있는 물속에서 헤엄치는 일이 전부인 양 대책 없이 꼬리를 흔든다 웅덩이를 살아가는 그들은 아직 성년이 되지 못해 풀쩍 뛰어넘지 못한다 봄볕에 말라 버린 무논이 그들의 선택지는 아니었는데 날개를 달아 준 것도 아니기에 어쩌다 놓인 말라 가는 논에서 몸부림치다 말라 가는 일이 태어나서 한 일의 전부 뜨거운 햇볕 아래 벌거벗은 몸으로 몸부림치는 일이 넘을 수 없는 벽 앞에서 끝과 시작에 절망한 일이 전부 그리하여 어느 날 흔적이 소리 없이 지워지는 일 벗어나려 꼬리를 파닥이는 일 그것이 일생 한 일 *시집/ 이제 우산이 필요할 것 같아/ 걷는사람 봄날이 있다 - 장시우 녹슨 드럼통이 키우는 개구리알 언제부터였을까 버려진..

한줄 詩 2022.04.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