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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바닥의 생 - 이현조

발바닥의 생 - 이현조 가운데가 움푹하다 하늘을 닮았다 서쪽 끝에서 시작된 걸음마는 고단한 보행을 지나 지금은 천기를 읽을 나이 으르렁대는 천둥 뚫고 각질 더덕한 걸음으로 어머니에게 돌아가는 중이다 시끌벅적 물장구 치는 아이들 돌부리에 치이며 졸졸대는 시냇물 물 등에 얹힌 시간의 주름들 돌이켜보니 아버지는 언제나 맨발이었다 몸을 지탱하며 앞만 보던 엄지발가락이 한풀 꺾여 하늘 향해 있다 *시집/ 늦은 꽃/ 삶창 늦은 꽃 - 이현조 올해는 가물어서 꽃이 안 피나 봐 아내의 속을 태우더니 여름 장마보다 긴 가을장마에 일제히 꽃망울 터트렸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다지만 안 아픈 손가락 있다 똑같이 깨물어도 더 아픈 손가락 있다 아내는 셋째에게만 애정 표현 안 한다고 셋째는 자식도 아니라고 어머니..

한줄 詩 2022.04.28

접히는 부분이 헐거운 골목 - 이성배

접히는 부분이 헐거운 골목 - 이성배 폐지를 줍던 노인이 치킨집 앞에서 상자 밑바닥의 테이프를 뜯자 골목이 헐렁헐렁해진다. 골목의 벽들은 갈라지고 기울어 바람의 마을을 재개발한 흔적이 역력하다. 어느 집이든 대문이나 현관 신발장에 노끈 뭉치나 테이프가 있는 것은 느닷없이 접히는 부분이 찢어지거나 밑이 빠지는 생활을 여미는 데 요긴하기 때문 무게를 감당하기에는 주름진 몸이 수월하다는 듯 이 골목 사람들의 몸도 접히는 부분이 많다. 사는 것이나 죽는 것이나 이 골목에서는 다 한 짐 거리 노끈으로 꽉 묶으면 그만 허리 굽은 노인이 모서리에 비가 샌 흔적이 있는 빈집을 질질 끌고 가는 사이 뒤쪽이 유리 테이프로 꼼꼼하게 여며진 달이 뜨고 있었다. *시집/ 이 골목은 만만한 곳이 아니다/ 고두미 꽃의 가계(家系)..

한줄 詩 2022.04.27

반달 - 김승종

반달 - 김승종 태평동 여인숙 골목 요양원으로 아내 따라 그는 장인 뵈러 간다 푸른 하늘 계수나무 아래에서 돛대 없이 난발 장인은 늙어 가고 삿대 없이 단발 아내는 어려 가는데 누가 토끼인지 아닌지도 알 수 없다 그는 알 수 없지 눈썹 사이 주름 같은 그 길로 다시 이른 자리 해병 이병처럼 각지게 머리 깎여 미용사 출신 원장 옆에서 한 번 웃다가 엎드리고 막무가내로 끼니 외면한다 그가 앉히려다 식욕 같은 힘에 물러서고 아내가 아무리 애원해도 눈 뜨지 않는다 누구에게 분노하는 건가 혹 자신에겐가 알 수 없다 그는 알 수 없지 태평동 붉은 창문 닫힌 여인숙 골목 고개 숙이고 그는 아내 따라가 눈 감고 분노하는 장인 뵈어야 한다 어제인지 내일인지 푸른 하늘 계수나무 아래에서 서쪽 나라로 갔던 장모가 절구를 찧..

한줄 詩 2022.04.27

구름의 사주 - 윤향기

구름의 사주 - 윤향기 빈 들녘에 연기가 자욱하다. 짚 타는 연기가 매캐한 외로움이 되어 바람처럼 구름처럼 흘러가자 한다. 까마득한 하늘로 우르르 몰려가 새털구름을 훔쳐보거나 여우비에게 접근했다가 따귀를 맞고 홀로 지상으로 추락할 때도, 존재의 심연에 곤두박질하여 통곡의 볼륨을 올릴 때도 다 지났다. 저녁노을에 머리를 물들이면서부터는 구름의 눈물 닦아 주는 역할을 도맡고 레퀴엠(진혼곡) 듣는 것도 어색하지 않다. 그래서 나는 시간이 날 때마다 구름의 손바닥을 펴 본다. 구름 모자를 쓴 물고기 한 마리 천상의 춤을 멈추고 이제는 결가부좌다. 옴! *시집/ 순록 썰매를 탄 북극 여행자/ 천년의시작 벼락을 맞다 - 윤향기 TV가 말했다. 꽃을 오래 보려면 물속에 설탕을 조금 넣으라고 어버이날 꽃바구니가 배달되..

한줄 詩 2022.04.27

귀신도 살고 사람도 살고 - 이현승

귀신도 살고 사람도 살고 - 이현승 스승이 없었다면 오늘날 네가 있었겠느냐 하지만 제자가 없다면 스승이 있겠습니까. 가르치는 일이 배우는 일이기도 하고 교학상장이란 말도 있지만 배우겠다는 사람은 없는데 가르치려는 사람은 왜 이리 많은가. 본래 성공하지 못한 사람들이 성공하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지만 처세에 능한 사람들이 예의는 미처 챙기지 못하는 것은 궁금한 건 많은데 알려주는 사람은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인가. 공부는 지식만을 구하는 일이 아니라서 학교가 반드시 공부만 하는 곳은 아니라서 커피숍도 있고, 화장품 가게도 있는 학교에는 학교가 없고, 제자가 없고, 스승이 없고, 가끔 친구는 있는데 교장선생님 말씀과 주례사의 미덕은 올바름에 있지 않고 그건 눈높이의 문제가 아니고 그냥 길이의 문제이다. 짧아야 ..

한줄 詩 2022.04.25

불면 1 - 한명희

불면 1 - 한명희 -난간 난간 위에 서 있던 어젯밤 길가에 습관처럼 서 있던 당신은 택시 기사와 드잡이한다 갑자기 사라진 어느 집을 두고 잠 못 들던 어젯밤과 무관하게 먹은 것도 없이 배가 부르다던 누구와도 무관하게 머리채를 잡고 흔들던 바람은 바람끼리 서로의 몸을 비틀고 매만져 장송곡 같은 저음의 노래를 만들고 흙빛이 된 하늘과 핏줄을 드러낸 나무는 난간보다 낮은 집에 팔을 뻗고 회초리를 든다 허물어진 집을 다시 짓거나 일으켜 세우기 위해 밤을 달리는 사람들이 당신만은 아니었으므로 당신을 지나쳐 온 집들과 앞서간 집들은 여전히 속도를 무시하고 눈을 보면 불쑥불쑥 솟아 있는 빌딩처럼 이 층으로 가는 난간에 기대 있다 뒤처져 마음만 앞서 오르는 나는 캄캄한 오밤중, 밤새 대궐 같은 집을 혼자 짓다 부수고..

한줄 詩 2022.04.25

거꾸로 읽는 세계사 - 유시민

오래전이다. 80년대 후반쯤일까. 유시민이 그리 유명하지 않을 때 이 책을 처음 읽었다. 김진경 선생의 와 함께 이 책은 너무나 인상 깊은 책이었다. 내 의식을 바꾼 책이라고 해도 되겠다. 물론 그때 내가 진보인지 보수인지도 몰랐다. 조선일보도 열심히 읽던 시절이다. 어쨌든 개정판이라고는 해도 두 번 읽는 책이 극히 드문데 요즘 이 책을 읽고 나서 다시 공부가 되었다. 여전히 내 호기심은 9살 아이 같아서 꼬리를 물고 나오는 신간에서 눈길을 뗄 수 없다. 한 번 읽은 책을 모셔두더라도 다시 꺼내 읽기가 쉽지 않다. 그런데도 이 책은 처음 읽은 것처럼 흥미롭게 술술 읽힌다. 교과서나 매스컴에서 본 세상이 기본은 아니다. 유시민은 세계 곳곳의 역사를 뒤집어 본 시각으로 독자들의 눈을 새롭게 뜨게 한다. 특히..

네줄 冊 2022.04.25

시적 소장품 전시회

시적 소장품이라는 제목에 이끌려 보게 된 전시회다. 특별한 목적 없이 전시장 나들이는 이렇게 이색적인 작품을 감상할 기회가 된다. 시립미술관은 상설전이 열리는 터라 무작정 들러도 헛걸음 할 일은 없다. 1층 카페에서 커피 한 잔 마시며 창밖의 오가는 사람들 구경하는 맛도 괜찮다. 신기한 건 계절마다 사람들 옷차림 달리지는 것뿐 아니라 걸음걸이도 바뀐다는 것이다. 시적 소장품전은 단체전이다. 시와 미술이 다른 예술 장르지만 상호 보완적인 예술이라는 걸 느낄 수 있다. 고매한 감상평을 남길 것까지야 있겠는가. 골목길에 늘어선 화분들 꽃 구경하듯 전시장 천천히 돌고 나서 머리가 개운해지면 그것으로 만족이다.

여덟 通 2022.04.23

노실의 천사 - 권진규 탄생 100주년 전시회

시립미술관에서 권진규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제목인 가 무슨 뜻일까 궁금했다. 전시회 설명을 찾아 보니 노실의 천사는 1972년 3월 3일 조선일보 연재 기사에 실린 권진규의 시, 에서 인용했다고 한다. 그의 삶과 예술을 담은 이 시에서 노실의 천사는 가마 또는 가마가 있는 방으로 아틀리에의 천사, 즉 그가 작업을 통해 구현하고자 했던 순수한 정신적 실체로 볼 수 있다는 설명을 읽고 제대로 이해를 했다. 이번 전시는 권진규의 작품 세계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기회다. 언제 이렇게 방대한 권진규 작품을 감상할 수 있었던가. 그가 자살로 삶을 마감했다는 것 때문에 그동안 나는 불운의 조각가로만 알고 있었다. 이번 전시는 권진규의 작품 세계를 온전히 이해함과 동시에 그의 삶도 알게 되었다. 전시장 곳곳에 작..

여덟 通 2022.04.23

죽은 설교자 - 최규환

죽은 설교자 - 최규환 오래된 어촌 상회에서 컵라면을 말아먹던 사람 엽서에 적힌 안부가 궁금해 뜨거움을 불면서 해가 지고 있다고만 말하고 세상 누구보다 고독한 등을 보이지 않았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나였으나 그가 적어놓은 운율은 바다에서 들려오는 비밀이었다 집으로 가고 싶은 사람이 모였다가 흩어지는 동안 정말이지 가까운 약속이 오고야 말았고 빼곡한 노트에서 흘러나온 소리는 부서질 듯 무너질 듯 삶에서 가장 가까운 거리는 죽음일 거라 여기면서 세상은 빛으로 사는 게 아니라 그늘에 담긴 내용을 읽고 가는 울음일 거라 말하면서 바람 부는 방향에서 회오리가 쳤는데 오늘처럼 먼 산 보는 일이 잦았던 어느 봄날 한 번도 본 적 없는 나였으나 집으로 가는 길은 마음만으론 갈 수 있는 건 아니고 견디는 식물의 맘 어..

한줄 詩 2022.04.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