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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사렛 2 - 전대호

나사렛 2 - 전대호 방위할 때 역전에서 마주치던 창녀들을 기억한다. 그는 나사렛 사람, 창녀의 친구. 엠비씨 신인왕 출신의 전직 복서 강 사범에게, 형, 사람 때리면 기분이 어때? 하니, 사람은 묶어놓고 때려본 놈들이 제일 잘 때려, 하더군. 봇이라도 좋으니 클릭해줘, 짜릿한 클릭, 황홀한 클릭. 네가 교수가 될 줄 알았어. 부동산 하는 친구가 나를 50층 옥상 전망대로 이끈다. 저쪽은 동탄, 이쪽은 광교. 강 사범은 퀼른에서 불량배 세 명의 빗장뼈 연골을 부러뜨린 적이 있다. 경찰이 무기를 내놓으라 다그쳤을 때 강 사범이 내민 것은, 맨손이었다. 봇이라도 좋으니 날 교수로 불러줘, 짜릿짜릿 교수, 으쓱으쓱 교수. 방위할 때 역전에서 마주치던 창녀들을 기억한다. 나사렛 아가씨들, 나사렛 아줌마들. *시..

한줄 詩 2022.04.23

별똥별은 아프다 - 이영춘

별똥별은 아프다 - 이영춘 발자국 하나 남기려고 저토록 몸부림치는 꽃잎들 꽃잎 속에서 물방울이 튄다 꽃잎 속에서 바람에 분다 물 오른 나무 한 그루 하얗게 일렁이는 그림자 속에 그림자들이 숨어드는 그 꽃잎 숲에 이름표를 단 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다 나무들이 별을 안고 별처럼 어둠을 뚫고 간다 닿을 수 없는 저 허공의 아득한 하늘 끝자락에 구름 기둥 하나 둥둥 떠간다 물방울 기둥 하나 하얀 가루로 부서져 내린다 어제는 심장에 방아쇠를 당긴 헤밍웨이가 깃발을 올리고 오늘은 긴 코트 자락에 자갈돌을 삼킨 울프가 강물 속으로 걸어간다 내일은 반 고흐가 귀 없는 귀로 오베르 밀밭으로 걸어 들어가 잘라낸 귀 한쪽을 찾아 총총 하늘로 올라갈 것이다 하늘이 열리고 지상은 문을 닫는다 이름 없이 사라질 꽃잎, 꽃잎들 별..

한줄 詩 2022.04.22

어머니의 끼니 - 김용태

어머니의 끼니 - 김용태 내가 개(犬)와 다를 게 없나니 비쩍 마른 어미의 젖을 빨아대는 살집 투실한 강아지를 아버지께선 자주 떼어놓곤 하셨는데 내 어릴 적 배고픔도 고픔이려니와 빵을 얻어먹는 재미 또한 쏠쏠하여 하굣길엔 취로사업중인 어머니를 버릇처럼 찾아갔었다 그날도 어머니는 흘러내린 코를 닦아 주시며 품에서 빵을 꺼내 건네셨고 철없이 그 걸 받아 달게 먹고 돌아서는 순간, 점심을 또 자식놈한테 빼앗겼으니 기나 긴 해를 어떻게 견딜 거냐며 어머니를 나무라는 소리가 나지막이 들렸다 산새가 제 이름을 부르며 우는 산골 시오릿길을 엄마, 엄마라는 이름을 그 새처럼 부르며 울며 내려 온 그날 이후, 비로소 죽순처럼 자란 내 소견과 당신의 끼니를 바꿀 수가 있었다 *시집/ 여린히읗이나 반치음같이/ 오늘의문학사 ..

한줄 詩 2022.04.22

영원히 사울 레이터

요즘 머리맡에 두고 틈틈히 들춰보는 사진집이다. 사울 레이터의 사진이 대부분이지만 군데군데 만나는 짧은 문구가 눈을 잠시 쉬어 가게 한다. 사울 레이터는 뒤늦게 유명세를 얻은 작가지만 참 시적인 작품을 남겼다. 필름으로만 있고 아직 인쇄되어 발굴되지 않은 사진이 많다고 한다. 이 책에서 실린 사진만으로도 사울 레이터의 세계을 이해하는데 손색이 없다. 사울 레이터는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은 장면을 담았다. 자신만의 시각으로 본 풍경은 50년이 지났어도 여전히 빛을 발한다. 여행지에서 떼로 몰려 다니는 사진가들을 자주 본다. 누구나 찍을 수 있는 풍경을 찍기 위해 전봇대에 늘어선 참새들처럼 같은 장소에서 줄줄이 모여 사진을 찍는다. 과연 자신만의 특색이 나올까. 모든 사진이 작품이 될 수는 없다. 그리고 스..

네줄 冊 2022.04.22

밥할 자격 - 김륭

밥할 자격 - 김륭 쌀을 씻어 안치다, 문득 고양이 밥부터 챙긴다 이럴 땐 나도 발이 네 개인 것처럼 착하다 작은 밥그릇 앞에서 한순간 세상의 전부가 된 밥그릇 하나를 지키기 위해서 밥그릇 속에 머리부터 집어넣고서는 굳건하다 아기 고양이, 아기를 버티는 있는 네 개의 발 새가 온다, 나비가 온다, 발을 가지러 아기를 가지러 운 좋은 날이면 귀뚜라미를 톡톡 두드려 울음을 꺼내듯 한 생을 건너 밥그릇이다, 하나뿐인 밥그릇 하나를 지키기 위해 버티고 선 저, 네 개의 발은 잘려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을 부장(副葬)이다 죽어서도 뛸 수 있는 심장의 상상력이다 당신을 기다리는 일이 그랬다 *시집/ 나의 머랭 선생님/ 시인의 일요일 나는 이 이야기를 나의 머랭 선생님에게 해 주었다 - 김륭 좀 많이 늦었지만 결혼을..

한줄 詩 2022.04.21

행복 - 심재휘

행복 - 심재휘 집을 나서는 아들에게 보람찬 하루라고 말했다 창밖은 봄볕이 묽도록 맑고 그 속으로 피어오르는 삼월처럼 흔들리며 가물거리며 멀어지는 젊음에 대고 아니다 아니다 후회했다 매일이 보람차다면 힘겨워 살 수 있나 행복도 무거워질 때 있으니 맹물 마시듯 의미 없는 날도 있어야지 잘 살려고 애쓰지 않은 날도 있어야지 *시집/ 그래요 그러니까 우리 강릉으로 가요/ 창비 신발 모양 어둠 - 심재휘 끈이 서로 묶인 운동화 한켤레가 전깃줄에 높이 걸려 있다 오래 바람에 흔들린 듯하다 어느 저녁에 울면서 맨발로 집으로 돌아간 키 작은 아이가 있었으리라 허공의 신발이야 어린 날의 추억이라고 치자 구두를 신어도 맨발 같던 저녁은 울음을 참으며 집으로 돌아가던 구부정한 저녁은 당신에게 왜 추억이 되지 않나 오늘은 ..

한줄 詩 2022.04.21

내 작은 방 - 박노해 사진전

박노해 시인이 사진 에세이집 을 내면서 소박한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문화계에서 그리 큰 관심을 받고 있진 않지만 박노해의 사진 에세이 시리즈는 계속 나오고 있다. 그가 시인으로 비주류였듯이 사진으로도 박노해는 비주류다. 천성이 비주류인 나는 이런 박노해가 좋다. 한때 노동자 시인으로 추앙 받았으나 목소리에 힘을 빼면서 시인은 더욱 비주류의 삶을 살고 있다. 사진집치고는 아주 작다. 작은 정도가 아니라 거의 엽서 크기 정도의 책이다. 책에 실린 사진 중에서 고른 작품이 이번 전시장에 걸렸다. 카페 2층에 있는 전시장도 아담하다. 사진은 감동적이다. 전부 흑백으로 찍었다. 인간에게 방은 태어남부터 죽을 때까지 함께 한다. 엄마의 자궁이 방이고 자기 방을 갖기 위해 평생을 바쳐 아파트에 목숨을 건다. 그리고..

여덟 通 2022.04.18

어둠도 빛이 - 권순학

어둠도 빛이 - 권순학 사월이 잔인한 것은 흐드러진 꽃 때문이 아니라 그럼에도 오기 때문이라고 누구도 말하지 않았다 살다 보면 에스프레소 같은 날도 아포카토 같은 때도 있지만 잔만 바라보아야 하는 날 많고 빈 잔조차 없는 날 더 많다고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밤마다 글썽이는 별 누굴 찾으며 낮에도 저러고 있다고 그 뒤에 그가 있다고 누군가 말할 줄 알았다 누구는 잊고 누구는 세고 누군가는 세며 잊지만 어둠도 빛이 될 수 있다고 나도 그럴 수 있다고 누구도 말하지 않았다 *시집/ 너의 안녕부터 묻는다/ 문학의전당 비교 - 권순학 참 익숙하지만 무거운 그 말 누구나 무엇이든 적어도 한번쯤은 그 제물로 바쳐졌겠지만 SNS의 화젯거리 '계란 판과 갓 나온 종이 신문' 그들 효용성을 비교한다 바늘구멍으로 보거나 그..

한줄 詩 2022.04.18

목주름이거나 목걸이거나 - 나호열

목주름이거나 목걸이거나 - 나호열 한평생을 목줄에 묶여 이곳까지 왔다 굴복인지 서툰 깨달음인지 이리저리 끌려다녔다는 슬픔과 아니, 한평생을 질긴 목줄을 끊으려고 이가 닳고 몸이 이지러졌다는 노여움이 내게 목줄을 채운 그를 그립게 한다 끈질긴 추격자를 피해 몸을 부숴버린 바람이 당도한 망명지처럼 목주름은 세월이 내게 준 값나가는 목걸이 아무도 호명하지 않는 천일야화의 주인공이 되어 또 한 줄의 문신을 새기는 죽은 봄이다 *시집/ 안부/ 밥북 고시원 - 나호열 개천의 지렁이가 용이 되려면 고시(考試)가 외길이었지 청춘을 불사르고 가는 벼랑길 십 년 전쯤 우연히 만난 친구가 고시원에 있다 하기에 면박을 주었지 이제 용이 되기엔 너무 늦은 나이 허튼 꿈을 버리라고 했지 그믐달처럼 휘어진 그의 등이 마지막 모습 ..

한줄 詩 2022.04.18

수치, 인간과 괴물의 마음 - 이창일

공부하는 마음으로 읽었다. 저자 이창일은 심리학을 전공한 사람답게 부끄러운 감정의 원천을 조근조근 파헤친다.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성현들의 가르침도 틈틈히 인용한다. 알면서 외면하는 것이 부끄러움이다. 부끄럽다는 말과 수치스럽다는 말이 대동소이하지만 수치라는 단어가 훨씬 더 강렬하게 다가온다. 얼굴을 더 빨갛게 만든다고 할까. 읽으면서 노무현 대통령을 떠올렸다. 또 노회찬과 박원순도 생각이 났다. 그들은 수치스러움을 죽음과 바꿀 만큼 당신의 인생이 오염되는 것을 견디지 못했다. 나는 죽음을 미화하지 않지만 그들의 죽음을 존중한다. 구차한 변명을 하느니 미련 없이, 일본말 좀 쓰면 앗싸리 목숨을 버리는 삶을 택했다. 예전에는 손석희 앵커의 뉴스룸을 봤다. 당일 본방 사수 못하면 나중 유튜브로 꼭 봐야 했던..

네줄 冊 2022.04.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