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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력(視力), 또는 바코드 - 강시현

시력(視力), 또는 바코드 - 강시현 새벽에 널 안아 주고 오길 잘했다 거친 열대의 밤이 흘러갔다는 것을 내 몸에 무수히 박힌 숨구멍의 눈들이 모두 목격했다 오후의 깃발을 구청 공무원이 거둬 갔는지 바코드의 바람은 물컹해졌다 최신 가요와 술병이 나사처럼 조여진 유흥가의 흥취는 밝아 왔고 무연분묘의 헝클어진 뗏장처럼 네온사인이 뒷골목에 투숙했다 꿈이 없어 음악이나 하고 싶다고 노래방 주인은 흥얼거리며 빈 맥주병 박스를 쌓는다 경계 밖에선 누구나 무모함의 주먹을 쥐고 흔들었으나, 간절함이 사라진 거리에 이내 세금이 매겨지고 감시 카메라의 눈알이 불거졌다 첨벙대던 약속들, 그 불발의 결과물이 모여서 바코드 숲이 바람에 나부꼈다 애초에 약속 같은 건 없었고, 때 묻은 절망이 희망을 곁눈질하는 사이 노래가 없었다..

한줄 詩 2022.05.22

불시착 - 최백규

불시착 - 최백규 활주로 끝에 소년이 서 있다 그어버릴게 번지듯 퍼뜨려지자 우리는 영원하지 않을 거야 우리 없이 살아갈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죽어갈 거야 시동을 걸자 걷다가 질주하자 손을 흔들며 위험하도록 소리치면서 꿈에서 친구를 죽이고 자퇴하겠다는 애인을 달래다가 머리를 넘긴 채 식물원과 미술관을 걷는다 손차양을 한 아이의 뒤통수를 쓰다듬고 있자면 몇백년 전 당신과 이곳에 다녀간 내가 가지런히 덮을 옷을 지어 살고 있다 대공원과 경복궁에 나비가 있다는데 꽃밖에 보이지 않고 여름을 밟는 걸음이 곱다 이 순간을 위해서 그렇게도 많은 친구들의 무덤이 필요했던 거구나 등을 맞대고 자야 하는 자취방에는 마른 욕실이 있다 절룩거려도 깨진 적 없는 당신의 무릎을 안으며 흰 발을 만져 주던 일이 오래다 그런 삶 아무도..

한줄 詩 2022.05.22

빛도 없이 낡아 가며 흐르는 몸 - 김명기

빛도 없이 낡아 가며 흐르는 몸 - 김명기 야적장 철근을 옮긴다 이것도 한때는 흐르는 물이었을 거라 먼 시간 저도 모르게 흘러와 쌓이고 굳었지만 물결이었을 때를 기억하느라 휘청거린다 현장에선 고요한 명산은 필요 없다 쓰임새에 맞으면 죽어서도 살아 있다 산 자의 근육처럼 일렁이는 철근 그림자 장비에 얹히는 철근 무게가 늘어날 때마다 나도 모르게 자꾸만 허리 굽히며 겸손해진다 탄력과 반동에 익숙해진 습성 마치 저 무거운 것을 등에 지고 한없이 어디론가 흘러가야만 할 것 같다 세상에 없는 사람들이 남기고 간 것은 대체로 패배나 열등이다 자본주의 장점은 그것을 아무렇지 않게 흘려보내는 것이다 반나절 휘청거리는 철근 몇 다발 옮겼을 뿐인데 한생이 다 흐른 듯 마음이 헐거워진다 *시집/ 돌아갈 곳 없는 사람처럼 서..

한줄 詩 2022.05.21

내 생의 북쪽 - 김용태

내 생의 북쪽 - 김용태 싸리꽃 피었다, 졌다 봄이 갔다는 거다, 불쑥 다녀간 것이 계절만은 아니어서 그 아래 한 마리 나비, 환한 주검 펼쳐져 검은 상복 갖춰 입은 개미 행렬에 장엄히 실려 가고 있다 한철도 못 되는 생이지만 죽음이라 하면 저쯤은 되어야지, 혈육도 아닌 것을 쪼그리고 앉아 내 생의 북쪽을 가만히 들여다본 그런 날이 있었다 *시집/ 여린히읗이나 반치음같이/ 오늘의문학사 주검을 들추다가 - 김용태 채 육탈(肉脫) 되지 않은 주검 들추자 보기 흉한 것들 밥알처럼 매달려 어둠속에서 곡진한 조문, 바라보는 가슴 아리다 슬픔도 넘치면 때로는 소리를 잃는 것인지 곡(哭) 없이 마른 울음 삼키는 저들과, 죽어 허망한 것은 살아 무슨 인연이었길래 마지막 육즙(肉汁)마저 알뜰히 젖을 물리고 종래 터럭 하..

한줄 詩 2022.05.21

누가 내 귓속에 꽃을 심어 놓았나 - 강회진

누가 내 귓속에 꽃을 심어 놓았나 - 강회진 귀뚜라미 같기도 하고 여치 같기도 하고 초가을 밤 지리산 청령치쯤에서 들은 풀벌레 소리, 풀잎들 몸 비벼대는 푸른 소리 가끔 고향집 마당 사각사각 눈 밟는 소리 사립문 밖으로 사라지던 고라니의 뒷모습 무거운 돌을 덮고 가재처럼 모로 누우면 자꾸만 들리는 맑은 계곡 물 흐르는 소리 여름밤 보랏빛 도라지꽃 폭폭 터지는 소리 살얼음 속 보랏빛 노루귀 꽃대 오르는 소리 누가 내 귓속에 꽃을 심어 놓았나 늙은 엄마는 내가 홀로 늙어가는 증거라며 신세학원이구나, 봄비처럼 중얼거려요 이명은 밤마다 나를 낯선 지명으로 데려다 놓아요 낮은 수척하고 밤은 짙으니 소낙비처럼 쏟아지는 잠을 이길 수 없어요 귀를 길게 늘이고 나는 이제 봄으로 살기로 했어요 *시집/ 상냥한 인생은 사..

한줄 詩 2022.05.19

운성으로 가는 서사 - 이영춘

운성으로 가는 서사 - 이영춘 저 푸른 가지 끝에 등불 하나 달려 있다 그 불빛 아래 서성이는 거인의 목같이 긴 기다림의 목덜미가 욕망이란 이름으로 매달려 있다 운명은, 어느 날은 서쪽으로 목이 기울고 어느 날은 동쪽 가지 끝에 매달려 그 성문 앞에서 일렁이는 그림자 하나 나를 판화 한다 오늘 이 순간, 동쪽으로 가는 문 활짝 열어 줄 거인은 누구인가 수성 성씨를 가진 물줄기의 기운으로 둥근 해를 건져 올릴 귀인은 누구인가 동쪽에서 온다는 나의 운수는 어느 하늘 아래서 나침판을 돌리고 있는가 갈 길을 잃고, 방향을 잃고 아득한 저 방파제 너머 그린 듯 앉아 있는 어부의 칼끝에서 가쁜 숨 몰아쉬고 있는 흰 고래 한 마리, 울컥울컥 비린 부유물 쏟아내며 붉은 햇덩이 안고 돌아올 거인을 기다리고 있다 내 안에..

한줄 詩 2022.05.18

우리는 환상적으로 헤어졌다 - 김태완

우리는 환상적으로 헤어졌다 - 김태완 손을 잡지 않아도 우리는 이어진다 포옹을 하지 않아도 바짝 다가가지 않아도 우리는 어떻게든 이어진다 너와 내가 한없이 달라도 생명이 없어도 만난 적이 없어도 우리는 이어지고 연결된다 마음이 닿으면 입구도 출구도 없는 빛 고운 방 안에서 영원히 나올 수 없는 환상을 이야기한다 나오지 않고 꿈틀대며 한자리를 지키는 고목으로 언제든지 그립고 향기로운 눈물이 될 수 있다 너와 나는 멀리 있어도 가깝고 가까이 있으면 꿈결 같다 그렇게 이어지고 이어진 모든 것들이 작은 아픔에 마음이 닿은 줄 모르기도 하지만 외면하고 뿌리친 수많은 뒷걸음이야 온전했을까 한번 닿은 마음은 달빛 내린 방 안의 구석구석 별들이 가득했던 순간이 사라지는 이별을 만나더라도 네가 어느 곳 어느 장소에서 무..

한줄 詩 2022.05.17

미안하다 애인아 - 나호열

미안하다 애인아 - 나호열 세월은 거짓말도 용서한다 모질게 도망치듯 너를 보냈는데 때는 눈보라 치는 겨울밤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다리에서 내게 결별의 찬 손을 내민 것은 너였다고 말한다 다시 어디서든 너를 만날까 두려웠는데 내 눈 안에 너의 얼굴이 담겨 있어 눈물로 씻어내려 했다고 말한다 세월은 자꾸 흘러 거짓말은 거짓말의 진실이 되고 나는 견우 너는 직녀라고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고 있을 때 온몸을 웅크린 채 땅바닥에 내쳐진 돌멩이는 딱딱한 눈물이었다 세월은 주어를 이렇게 바꿔주는 것이다 *시집/ 안부/ 밥북 이름을 부르다 - 나호열 떠나간 사람을 붙잡을 수는 없어도 마음 밖으로 어찌 보낼 수 있으랴 아무도 나를 불러주지 않을 때 나를 호명하면 장항선이 달려오고 바다에 가닿는 언덕 등 뒤로 엄동의 동백 ..

한줄 詩 2022.05.17

지속 가능한 나이듦 - 정희원

노인의학에는 노쇠 지수란 게 있다. 100개의 부속 중에 몇 개가 고장났는지 센 다음 10개가 고장났다면 0.1로 수치화하는 것이다. 나이가 들면 당연 그 수치는 오른다. 그 속도는 평소 얼마나 건강 관리를 하느냐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100 중 50개가 고장 나면 노화지수는 0.5다. 보통 65개가 고장이 나서 노쇠지수가 0.65가 되면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그러니까 우리 몸의 3분의 2가 고장나면 죽게 된다는 뜻이다. 70 살 동갑내기 두 사람이 건강검진에서 발견된 위암 수술을 위해 걸어서 병원에 입원을 했다. 한 사람은 입원해서 다음날 위암 수술을 받고 며칠 만에 퇴원해서 일상생활로 복귀했다. 다른 한 사람은 수술 다음날부터 섬망 증상이 생겨 밤낮이 바뀌기 시작하더니 거의 먹지를 못하고, 수액을..

네줄 冊 2022.05.17

우리에겐 기억할 것이 있다 - 박래군

인권운동가 박래군 선생의 책은 꼭 읽으려고 한다. 그는 시종일관 남들이 시선을 주지 않는 곳에 눈길을 준다. 이 책은 아프게 살다 간 사람들의 흔적을 따라 간 눈물 자국이다. 동학농민혁명, 천주교 순교, 진주 형평사운동, 육이오 민간인 학살, 동두천 기지촌 등 상처 받은 사람들의 현장을 찾아 나섰다. 이런 곳이 제대로 보존되어 있을 리 만무하기에 희미한 흔적을 되살리기 쉽지 않다. 특히 광주대단지 사건 현장과 진주 형평사 운동, 동두천 기지촌 현장이 인상적이다. 흔적 없이 사라졌거나 관심 두지 않으면 눈에 띄지도 않을 초라한 기념물이 더욱 아픈 흔적들이다. 이 책의 제목처럼 상처는 언젠가 말을 한다. 독립 운동을 한 것도 숨기고 살아야 했던 시절이 있었다. 하물며 빈민이나 하층민이었음이 드러날 이런 현장..

네줄 冊 2022.05.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