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무렵 - 김화연

마루안 2022. 5. 8. 19:52

 

 

무렵 - 김화연

 

 

무렵이란 말 좋지

마지못해 기울어진 즈음,

자칫 잘못하면 미끄러지거나 빨려 들어가기 쉽지

모든 것을 두고 온 곳이거나

모든 것을 가져다 놓을 수 있는 곳

시소처럼 무거운 것은 뜨고

가벼운 것은 내려앉는 그런 무렵

 

꽃들이 무더기로 피어도 좋고

붉게 하교하던 노을이나

제철 꽃들의 기억을

모두가 나누어 갖고 있는 그 무렵들

하루에도 몇 번 있고

한 달에도, 몇십 번 있는

움직이는 무렵

 

아득한 핑계들을 모아도 좋은

그립다고 말해도 좋고

지긋지긋하다고 진저리를 치기도 좋은

해 질 녘 만나면

추적추적 내리는 홑겹의 비를 덮고 낮잠을 자도 좋은

그런 저런 무렵들

 

어디까지 가는 스산함일까

가을 들녘을 아지랑이처럼 걸어와

흰 머리카락을 벗기다 갈

이런저런 소문으로 마무리되는 무렵들

 

비스듬한 날씨나 특별한 날짜가 아니더라도

기억나지 않는 날짜들의 근처이거나

여행하는 날짜들의 근처에 있는

그리운 무렵들

 

 

*시집/ 단추들의 체온/ 천년의시작

 

 

 

 

 

 

화양연화 - 김화연

 

 

어느 해였을까

갓 꺾인 꽃 무리로 나에게 안긴

한 아름의 꽃

아침을 여는 새들과 저녁 바람이 깃든

봄의 사절단이었지만

지금은 사막처럼 갈라진 마른 꽃

 

나도 한때는 바구니 하나에

세상 봄 다 담긴

그런 봄을

코웃음 치며 받았었지

 

누구나 지나가는 봄을

붉은 가시 벽과 도도한 줄기를 키워 가며

바구니에 담았던 그런 봄

화등잔 눈빛으로 받은 한 바구니의

옛 봄

 

꺾인 봄에서도

다시 꽃 피고 또 시들어 간다

어떤 마음으로 봄을 대신할지

이제 남은 봄은 몇 개나 될지

 

꽃바구니와 봄은 비례할까

버려진 꽃바구니들은

다시 여름의 의미로 시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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