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돋보기의 시간 - 정덕재

마루안 2022. 5. 8. 20:00

 

 

돋보기의 시간 - 정덕재

 

 

온라인 서점에서 날아온 상자를 열기 전에

칼이나 가위를 찾아야 하고

추리소설에 어울리는 목차가 제대로 되어 있는지

돋보기를 찾아야 한다

 

테레비를 보기 위해 리모컨을 찾는 시간

자동차를 타려고 열쇠를 찾는 시간

전화를 걸기 위해 휴대폰을 찾는 시간

 

모든 사물과 일체가 된 시간을 모아 놓고

습관과 게으름과 욕망 사이에서

잘못의 경중을 따지기 전에

목차를 읽는

돋보기는 찾아야 한다

 

오래전 살인사건의 혈흔을 찾던 돋보기는

낡아졌고

카펫 위 엉뚱한 머리카락을 찾다가

한가한 빛으로 들어온 오목렌즈 놀이로 태워 버린다

 

보청기는 없더라도

상자 밖으로 새어 나오는 파열음을 추적하기 위해

돋보기는 찾아야 한다

 

거기에 살해당한 문자들이 묻어 있을 것이다

 

 

*시집/ 치약을 마중 나온 칫솔/ 걷는사람

 

 

 

 

 

 

56년 된 얼굴의 생일 - 정덕재

 

 

세수를 하고 거울을 본다

한 번도 제대로 닦지 못한 뒤통수는

오늘도 거울에 비치지 않는다

 

56년 동안

손바닥으로 뒤통수를 열 번쯤 맞았더라면

46년 동안

장난감 뿅망치로 장난스럽지 않게 다섯 번쯤 맞았더라면

36년 동안

붉은 벽돌로 뒤통수를 한 번이라도 정확하게 맞았더라면

부르르 떨며 일어나는 분노는

오랫동안 혈관을 흐르고 있을 것이다

 

매일 아침 세수를 하며 거울을 본다

뒤통수를 비추지 못하는 욕실에서

취기에 부르는 해피버스데이 노래는

배수구를 빠져나갈 뿐이다

 

 

 

 

# 정덕재 시인은 1993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비데의 꿈은 분수다>, <새벽안개를 파는 편의점>, <나는 고딩 아빠다>, <간밤에 나는 악인이었는지 모른다>, <대통령은 굽은 길에 서라> 등이 있다.

 

 

'한줄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거미집 - 한명희  (0) 2022.05.12
병원 정문에서 - 신철규  (0) 2022.05.09
무렵 - 김화연  (0) 2022.05.08
오늘이라는 이름 - 이기철  (0) 2022.05.07
열등생 - 박용하  (0) 2022.05.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