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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보다 먼저 오는 새 - 박봉준

오월보다 먼저 오는 새 - 박봉준 뻐꾸기 새끼에게 쉼 없이 먹이를 잡아다 먹이는 붉은머리오목눈이 뱁새를 보고 있자니 울화가 치밀었다 뱁새 새끼를 모두 밀어내 죽이고 염치없이 입을 벌리는 덩치 큰 뻐꾸기 새끼 뱁새는 탄생의 비밀을 아는지 모르는지 해마다 되풀이되는 이 모순을 사람들은 섭리라고 하겠지 어쩌다 제 손으로 혈육을 키우지 못하고 심청이 아비 젖동냥하듯이 이곳저곳 탁란하여 눈도 채 뜨지 못한 어린 새끼 손에 악의 피를 묻히는 뻐꾸기의 생도 참 기구하다 싶어 그 소리 다시 들어보니 녹음 짙어가는 들녘이 다 평화로운 것만이 아니다 천치 같은 뱁새도 피를 묻힌 뻐꾸기도 함께 살아야 하는 푸른 오월 *시집/ 단 한 번을 위한 변명/ 상상인 그까짓 거, 참 - 박봉준 한날한시에 죽지 못한다면 남은 사람들을 ..

한줄 詩 2022.05.28

사진 속에서 몽글몽글 부풀어 오르는 - 김륭

사진 속에서 몽글몽글 부풀어 오르는 - 김륭 찰칵, 한순간이다, 한 번 갇히면 도망갈 수 없다. 백 년이 가고 천 년이 가도 아이처럼 해맑아서 무덤 속으로도 발을 내릴 수 없다 도라지꽃밭 같았다 얼굴을 마주 보면서도 보이지 않는다고 밤을 당신의 발처럼 만질 수 있는 곳. 모든 세상이 거짓말 같아서, 도라지꽃이 필 때도 도라지꽃이 질 때도 사람은 사람을 끝내 고쳐 쓸 수 없어서 사진 속에서 희멀겋게 웃고 있는 당신을 꺼내 발톱을 깎아 준다. 오늘은 내가 좀 착해진 것 같다. 느닷없이 이 형용사는 살 같다. 그래서 당신은 웃고 나는 울고 기억이란 다시는 오지 않을 사람의 뼈, 그러니까 촉망받는 주검들의 이야기. 당신 덕분이라고 쓸 수 있다. 언제부터 내 사랑은 골동품 상점의 고문서가 되어 버렸을까. 아버지,..

한줄 詩 2022.05.28

봄이 하는 일 - 류시화

봄이 하는 일 - 류시화 부드럽게 하고, 틈새로 내밀고, 물방울 모으고 서리 묻은 이마 녹이고 움츠렸던 근육 멀리까지 뻗고 단단한 껍질 부수고 아직은 약한 햇빛 뼛속으로 끌어들이고 늦눈 대비해 촉의 대담함 자제시키고 어린 꽃마다 술 달린 가리개 걸어 주고 북두칠성의 국자 기울여 비를 내리고 울대 약한 새들 노래 연습시키고 발목 겹질린 철새 엉덩이 때려 떠나게 하고 소리 없이 내린 눈 물소리로 흐르게 하고 낮의 길이 최대한 늘리고 속수무책으로 올라오는 꽃대 길이 계산하고 숨겨 둔 물감 전부 꺼내 오고 자신 없어 하는 봉오리들 전부 얼굴 쳐들게 하고 곤충의 겹눈에서 비늘 벗기고 꽃잠 깨워 온몸으로 춤출 준비하고 존재할 충분한 이유 찾아내고 가진 것 남김없이 사용하고 작년과 다른 방향으로 촉수 나아가게 하고 ..

한줄 詩 2022.05.27

검은 악보 - 신철규

검은 악보 - 신철규 중부고속도로에서 형체가 너무 뚜렷한 사체를 보았다 고양이인지 개인지 확인할 시간도 없이 지나쳤다 한참이 지나고 나서도 그것이 눈앞에 어른거린다 나는 눈을 질끈 감고 소리를 지른다 아무리 낭만적이거나 과격한 노래를 틀어놓아도 사라지지 않는 경악 가두지 못한 눈물이 쏟아지고 거두지 못한 부은 발은 내 뒤에 남아 있다 구겨진 심장이 펴지지 않는다 상하행선을 가르는 시멘트 분리대 근처에서 넘어갈 수도 돌아갈 수도 없던 그것은 한참을 망설이다 머리를 들이밀었을 것이다 그리고 번개처럼 지나간 둔기에 튕겨져 분리대에 다시 몸을 부딪치고 쓰러졌을 것이다 생생한 죽음은 싱싱한 주검이 되어갈 것이다 핏물이 번지고 흐르다가 말라붙을 것이다 내가 다시 집으로 돌아올 때는 분리대에 막혀 보이지도 않을 것이..

한줄 詩 2022.05.27

푸른 것들의 조그마한 항구 - 배한봉

푸른 것들의 조그마한 항구 - 배한봉 옥상에 상자 텃밭을 만들었다. 밑거름을 넣고 상추며 들깨 모종을 사다 심었다. 일주일에 두세 번 물을 준 것 뿐인데 어느 새 잎이 손바닥 만해졌다. 한 잎씩 채소를 거둬들이는데 푸릇푸릇 콧노래가 실실 새 나왔다. 부자가 이런 것이라면, 삿된 생각 한 점 들지 않고 그저 옥상에 동동 떠다니는 실없는 웃음을 데려와 웃거름으로 얹어주는 것이 행복이라는 재산을 불리는 일이라면 나는 엉뚱한 곳을 오래 기웃거린 것이다. 아하, 웃음이라는 배의 조그마한 항구 금은보화 싣고 출렁이는 볼록한 종이가방에서 푸른빛 환하게 흘러나오는 시간과 싱긋싱긋 계단을 걸어 내려오면 내 이마에 걸리는 초여름 건들바람이 수확한 상추, 깻잎 쌈밥만큼 달달했다. *시집/ 육탁/ 여우난골 꽃 심는 사람 - ..

한줄 詩 2022.05.26

끝에서 첫 번째 - 박은영

끝에서 첫 번째 - 박은영 세상의 쓴맛은 한밤중 더듬어 찾은 젖꼭지로부터다 젖을 떼기 위해 발라 놓은 마이신을 맛본 뒤 일찍이 우는 법을 터득하고 손가락을 빨았다 허기의 힘으로 마루 끝을 벗어나 극을 향해 신발코를 찧어 대며 대문을 나서니 딴 세상이었다 손끝으로 담배를 쥐고 피우는 패거리들과 용두사미가 되어 몰려다닌 시장, 귀퉁이에서 꼬리지느러미를 칼날로 내리치는 여자가 엄마라는 사실이 부끄러웠던 나는 세상을 끝장내고 싶었다 용의 꼬리로 사느니 뱀의 머리가 되리라 연필심을 깎으며 코피를 쏟았다 허공의 멱을 따는 칼끝과 가난한 꽁무니를 따라 걷다 보면 소주, 변리, 씀바귀, 이별,,,,, 끝에서 첫 번째 골목이 나오곤 했지만 나는 마이신보다 쓴맛은 찾지 못했다 죽을 만큼 쓰디쓴 그 끄트머리에서 꽃은 피고,..

한줄 詩 2022.05.26

봄이 잖아, 고개 들어 - 황현중

봄이 잖아, 고개 들어 - 황현중 괜히 부끄럽고 덜컥 겁이 나고 그렇다 담장 밑 초록을 보면 새로 시작하는 싱싱한 것들을 보면 시들어 가는 내 얼굴을 보면 한숨처럼 꺼져 가는 감탄사 몇 개로 봄이 오는 골목 닦아 보지만 되돌아보니 회색빛, 하늘 온통 누렇다 미세먼지 때문이라고 황사가 주범이라고 말들 하지만 이제 맑은 날 돌아오지 않는단다 여기저기 뒤적거려 봄소식 수소문해도 친구 장례식 때 입었던 검은 정장에 검은 넥타이가 목을 매고 있을 뿐 목이 메일 뿐 몇 달째 삭은 이빨 빼내고 새 뿌리 박고 있다 서른두 개 이빨 중 내 것은 거의 없다 죽은 뿌리에서 꽃대 올라 올 리 없는데 이게 웬일인가 입안의 통증이 자꾸 붉은 꽃 토해낸다 꽃가루가 온몸 간지럽힌다 부끄럽다 고목나무 발치에서 웅성웅성 키 세우며 기어..

한줄 詩 2022.05.26

내가 이 얼굴을 본 적이 있는지 - 장시우

내가 이 얼굴을 본 적이 있는지 - 장시우 오늘은 비가 내리고 음악은 내 머리 위에 앉아 낯빛을 살핀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얼굴이 둥실 떠오른다 내가 이 얼굴을 본 적이 있는지 끼어들 수 없는 이야기에 끼어든 낯선 얼굴이 있다 멋진 밤이니 촛불을 켜고 인터뷰를 진행해도 되겠습니까 당신은 어쩌자고 비 오는 밤 한 번도 본 적 없는 표정으로 거울에 떠올랐습니까 당신은 어디에서 왔을까 어떻게 당신과 당신 주위의 것들을 데려왔을까 빗소리가 부풀어 오르자 당신은 지워지고 플루트에 숨 불어 넣는 소리가 들린다 악보 어디쯤 쉼표로 있는 걸까 그런데 이 곡의 제목은 뭐라구요 덜컹대는 음표 사이 큰 숨을 불어 넣는 저 쉼표는 어떻게 그려 넣어야 할까 어쩌다 보니 낯선 일투성이다 내 고양이가 밥 달라고 깨우지 않은 일도..

한줄 詩 2022.05.23

Áspri méra ke ya mas - Agnes Baltsa

Agnes Baltsa - 우리에게 더 좋은 날이 오겠지 # 오늘 문득 이 노래가 생각나 연속해서 들었다. 오래전에 이 노랠 들을 때마다 마음이 차분해지면서 어떤 에너지가 충전되는 느낌이었다. 지금도 이 노래 효력은 여전하다. 오월 들어서 장미의 화사함에 가슴 떨리면서도 마음 한쪽이 무거웠다. 공간이 의식을 지배한다는데 나는 왜 그 반대일까. 마음은 우울하지만 눈부신 날씨와 이런 노래가 있어 다행이다.

두줄 音 2022.05.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