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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근진 - 심재휘

사근진 - 심재휘 오래전에 철거된 무허가 소주집은 경포 해변의 끝이었다 이름이 없고 사방이 유리창이어서 그냥 유리집이었다 한뼘 더 변두리인 사근진이 잘 보였다 경포에서 북쪽으로 지척인 사근진은 불 속에 침묵을 넣고 그릇을 만든다는 사기 장수의 나무 여름 해변의 가장자리에 놓여 경포도 아니고 그 너머도 아닌 가을의 변방 이를 테면, 추워져서 우리는 유리집에서 소주를 마셨던 것인데 할 말이 없어지면 겨울 사근진은 파도 소리를 데리고 유리집에 조금 더 가까이 왔다 유리집이 사라져도 사근진은 남아 사근진이 없다면 말없이 조금 먼 곳을 바라볼 경포도 없을 것이다 *시집/ 그래요 그러니까 우리 강릉으로 가요/ 창비 어떤 면접 - 심재휘 두명의 입학사정관 앞에 혼자 앉은 그는 문경에서 어제 저녁차로 올라왔다 한다 서..

한줄 詩 2022.05.15

봄밤의 일기 - 박위훈

봄밤의 일기 - 박위훈 세상의 귀란 귀는 다 닫아걸고 나를 들어줄 눈은 먼데다 두고 왔다 이를테면, 귀를 자른 어느 화가의 헐은 생애 같았지만 아무도 간섭할 수 없는 공중의 일 같은 거였다 보릿대 총총 푸른 불을 켜고 바람벽은 높고 높아 헛발질로도 닿을 수 없는 너와의 보이지 않는 불신의 간격처럼 거기, 다가설 수 없는 친연의 거리 갈대들이 서로 몸 비벼 겨울을 건너듯 뻐꾸기도 제 울음 한껏 불어재꼈던 그때 애끓는 탁란의 일기가 숲의 문장을 완성해 간다 구름의 등에 올라야 비의 내력을 알 수 있듯 바지게가 흘리는 달빛 몇 줌이 어둠을 품었던 것처럼 울음을 삼키며 천형의 날들을 견뎌야 했다 근본보다 중요한 것은 살아남는 일 누가 저 애면글면한 풍경에 혀를 차도 다만, 어미의 어미의 길을 좇을 뿐 떡국, 풀..

한줄 詩 2022.05.15

태어나길 잘했어 - 최진영

누군가는 죽지 못해 살고 누군가는 살기 위해 발버둥친다. 이 영화는 땀이 많이 나는 다한증으로 사회 생활에 지장을 받고 있는 여성의 이야기다. 춘희는 어릴 적 사고를 당해 같은 날 부모님이 돌아가신다. 외할머니 보살핌으로 외삼촌 집에서 사춘기를 보냈다. 외할머니의 따뜻함이 있다 해도 외숙모의 구박과 동갑내기 고종 사촌의 시기 때문에 힘들다. 춘희는 성인이 되어서도 제대로 된 직장을 갖지 못하고 연애도 할 수 없다. 종일 마늘을 까는 알바로 생계를 유지한다. 영화는 춘희의 현재와 어린 시절을 교차하면서 보여준다. 때론 너무나 사실적으로 때론 환타지가 섞인 이야기를 따라 가면서 춘희의 삶을 보여준다. 다소 어두울 수 있는 소재인데도 영화는 밝은 편이다. 결말도 희망적으로 끝난다. 누구나 자신의 인생이 가장 ..

세줄 映 2022.05.15

내 안의 원숭이를 보라 - 송경동

내 안의 원숭이를 보라 - 송경동 스물 초입 세상을 배울 때 꿈 하나는 나이 먹어서도 원숭이는 되지 말자였다 잠깐 민주주의자였다가 잠깐 정의의 편 참된 역사의 편이었다가 왕년의 시시껄렁한 무용담이나 늘어놓고 얕은 재주나 파는 이는 되지 말자 수많은 사람들의 헌신과 희생을 내 것인 양 사유화하고 헐값에 팔아넘기는 사람은 되지 말자였다 그러나 어느 틈에 내 안에도 들어와 사는 큰 원숭이 한마리를 본다 작은 재주에 으쓱하고 쉬지 않고 재롱을 부리며 광대처럼 무대에서 박수만 받고 싶어 하는 원숭이 사회를 검색하는 일보다 자신을 검색하는 일이 더 많고 숨겨진 진실을 캐는 일보다 눈곱만 한 자산을 계량하는 일이 더 많아진 원숭이 자신이 어떤 좁디좁은 철망 속에 다시 갇혔는지도 모른 채 몸집만 커다래진 *시집/ 꿈꾸..

한줄 詩 2022.05.13

내 무릎에 앉아 - 류흔

내 무릎에 앉아 - 류흔 내 무릎에 어머니가 앉아 토닥 토닥 등을 두드린다 하나의 종(種)으로써 관조할 거야 전반적으로 조용하던 밤이 부스럭댄다 죽지 말라고, 솔직히 어머니가 죽지 않았으면 한다 밤을 눈물 쪽으로 옮긴다 새벽이 되어 흐르는 방울을 보라 너도밤나무처럼 다년생 슬픔들이 돋아있다 나도 그러하냐? 미량의 관능도 용서치 않을 거야 정직한 신음은 정상위에서 흘러나오지 나는 시험에 들었으므로 대학에 가서 미학을 배웠다 아름답고 다정한 원소(元素)를 골고루 나눠주었다 내 무릎에 애인들이 앉아서 셔츠 안으로 쓱 손가락을 넣어 젖꼭판을 슬 슬 문지를 때 나는 또 하나의 종을 염두에 두었다; 외부에서 내부로 탈출하는 우세한 감정의 무리들 저 온유한 쾌락을 무어라 명명하지? 시간은 콸콸 추억 깊은 계곡에서 흘..

한줄 詩 2022.05.12

거미집 - 한명희

거미집 - 한명희 첫째도 성실 둘째도 성실 셋째도 성실 수평으로 걸려 있는 사훈 아래 삐딱하게 서 있는 현황판과 부서진 의자가 거미집을 키우고 있는 가구 공장 사무실 지켜보다가 계속 외면하다가 맺힌 빗물이 저도 모르게 찔끔 떨어졌는지 공장을 덮고 있던 구름이 뜨는 해를 기다리다 제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땀만 흘리다 사라졌는지 연극과 영화가 눈이 맞아 세상 물정 모르는 스물여덟이었다가 연기도 안 되고 얼굴도 안 돼서 몸이 되는 막노동으로 살다가 만난 여자와 나이 마흔이 넘어서야 찾아온 거미집 -이름 모를 곤충들의 날개와 누군가의 목숨과도 같이 흔들리는 줄에 이슬방울만 방울방울 달고 있는 창가엔 먼지를 뒤집어쓴 탁자와 뚜껑 열린 주전자가 주둥이를 삐죽 내민 채 있고 막걸리 자국 선명한 컵들은 지붕조차 사라진..

한줄 詩 2022.05.12

다음이 온다 - 김태완 시집

공감과 감동은 비슷한 듯하면서 다른 감정이다. 물론 공감이 가야 감동을 할 것이다. 이 시집은 둘 다 해당된다. 내 일방적 주장이다. 김태완 시인은 잘 알려지지 않은 시인이다. 전업으로 시를 쓰며 먹고 사는 사람은 거의 없으니 이 시인도 전업 작가는 아니다. 아마 전업이었다면 이미 굶어 죽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한국에는 시 읽는 사람보다 시 쓰는 사람이 더 많다. 안 쓰고는 못 배기는 사람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 하긴 누가 시켜서 쓰는 시라면 얼마나 고역일까. 무슨 인연 때문인지 이 시인의 시집을 모두 읽었다. 는 다섯 번째 시집이다. 낮은 곳을 향한 따뜻한 시선은 첫 번째 시집부터 초지일관이다. 이 시인도 시를 쓰지 않고는 못 배기는 팔자를 타고 난 것으로 보인다. 이번 시집에도 여전히 공감 가는 시가..

네줄 冊 2022.05.12

병원 정문에서 - 신철규

병원 정문에서 - 신철규 병원 정문 앞 과일 노점상 붉은 사과가 차곡차곡 쌓여 있다 아담과 이브의 타락 치욕의 공동체 누구나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다 늙음은 몸이 구부러지고 작아진다는 것이다 누군가에게 병원은 절망의 늪이고 누군가에게는 갱생의 회랑이다 겨울 햇살을 온몸으로 받으며 들어간 사람들 자신의 그림자를 보며 걸어나온다 언제부터 절망은 희망보다 더 깊고 짙어졌는가 불안과 원망은 왜 한통속인가 입안이 헐었다 음식에 손이 가지 않았다 당신이 그렇게 뜨겁고 쓰렸던 것도 다 내 안이 헐었기 때문이다 하늘이 헐었다 구름이 따갑다 나보다 내 그림자가 먼저 바닥에 널브러져 있다 노점상 앞 걸인은 여전히 엎드려 두 손을 모으고 있다 햇살 한 줌이 고여 환하다 성자처럼 일어나 내 손을 움켜쥘까봐 저 한 줌의 구..

한줄 詩 2022.05.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