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액자, 동백꽃 - 이명우

마루안 2020. 4. 28. 19:26

 

 

액자, 동백꽃 - 이명우 


액자에서 
아버지의 헛기침소리가 들린다 
헛기침에서 피가 나오고 있다 

아버지가 뇌졸중으로 쓰러진 날부터 
액자가 뒤틀어져 있다 

중심을 잃어버린 배처럼 한쪽으로 한쪽으로만, 기울어져 
하수도에서 강으로 바다로 흘러 
텅 비어 갔다 

나뭇가지처럼 말라가던 아버지는 벽에다가 
동백꽃 같은 점을 다닥다닥 찍어놓다가 
어느 날 

쿠웅 
액자 속으로 들어갔다 

틀어졌던 입이 무섭게 퍼지고 있다 
정지되어 있던 아버지의 입술이 떨린다 

액자를 뚫고 동백꽃이 활짝 피어 있다 


*시집, 달동네 아코디언, 애지 

 

 

 

 

 

 

입술 - 이명우 


꽃밭에서 날아가던 나비가 발등에 걸리는 늦은 오후 
날개의 파문이 꽃잎에 어지럽게 내려앉는다 
몽우리를 벗는 소리만 여리게 들리다가 잠긴다 

갓 태어난 순간이었다가 
가늘게 떨리는 가파른 웃음이었다가 
궤도를 벗어나는 죽음이었다가 

날개는 다시 나비가 된다 바람의 근육이 솟아오른다 
부풀어 오르는 날개를 접었다가 펴는 사이 
공기가 파르르 떨다가 끊어지다가 이어지다가 
겨우 중심을 잡는다 모든 균형이 제자리로 돌아온다 

임종실에 있던 그의 입이 열릴까 말까 
파닥거리는 날개가 목구멍에서 왁자그르르하게 가래를 긁어낸다 
마지막 남은 치약을 짜듯이 온몸이 부르르 떤다 
불규칙적으로 떨어지는 숨소리에 공기도 멈춘다 

드디어 나비가 날개를 편다 허공과 맞물린다 
열렸던 입술이 닫히는 순간이다 
공기와 마주 잡은 날개가 허공에서 멈춘다 
접고 펴는 일이 이렇게 간단명료하다 

소름이 돋아 올랐던 햇살이 대지를 가늘게 붙들고 있다가 
눈꺼풀이 내린다 그림자가 모든 구멍을 
천천히 닫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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