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길거리에서 기다리다 - 조항록

마루안 2020. 4. 28. 19:19

 

 

길거리에서 기다리다 - 조항록


오랜만에 길거리에서 누구를 기다리다
뭉클해진 건
사월(四月) 탓일까

하얀 꽃잎이 한꺼번에 쏟아지는 순정은
나를 놓치게도 한다
바삐 오가는 사람들을 관람하며
나의 분주(奔走)는
옛일이 되었다

제멋대로 정지해버린 그림자여
자주 그저께보다 멀리 기울어지는 나의 시선이여

인사동 수도약국 앞이었거나
해거름의 시청역 1번 출구였거나
신촌 그레이스백화점 근처 어디였거나
그날들에도 나는 기다림을 발효시키며
길거리에 머무르지 않았다

다시 만나지 않아도 좋을 사람을 기다리며
심란하기도 했으리라
길거리에서 누구를 만나 뒷길로 총총 걸음을 옮겼던
저 순간들
내가 닿지 않았던 날들

길거리에서 누구를 기다리다
새삼 가슴이 흐린 건
이미 사라진 것들 때문일까
아직도 곁에 남아 있는
어느새 낡은 것들 때문일까
길거리에서 누구를 기다리다 울컥 어긋나기도 하는

저 너머


*시집, 눈 한번 감았다 뜰까, 문학수첩


 

 

 

 

부고를 받다 - 조항록


어느 날 어머니가 지워졌다. 육십 평생 갱지에 일대기를 적던 그녀가 지우개로 박박 문지른 듯 깨끗이 지워졌다. 여기 빈 세상에 남은 것이라고는 지우개똥 같은 가련한 기억의 부스러기들.

까마득한 일이지 싶은데 겨우 육 년이 지난 날, 어머니 제사상에 머리를 조아리며 지워지는 것에 대해 생각했다. 지워지는 것은 낭만적 도피이거나 환멸의 히스테리가 아니라고. 어떤 의지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므로 무정한 것이라 말할 수 없다고. 지워지는 것은 아무리 붙잡으려해도 산산이 부서지는 신기루, 마른 가슴에 왈칵 쏟아지는 별똥별. 지워지고 남은 흔적에 대해 이야기해봤자 들어줄 천사는 곁에 없다.

오늘 어디에서 또 한 사람이 지워졌다.

 

 

 


# 조항록 시인은 1967년 서울 출생으로 추계예술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1992년 <문학정신> 신인문학상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지나가나 슬픔>, <근황>, <거룩한 그물>, <여기 아닌 곳>, <눈 한번 감았다 뜰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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