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노을을 위한 근정 - 황학주

마루안 2020. 4. 27. 21:45



노을을 위한 근정(謹呈) - 황학주



꽃에서 꽃물을 들어내는 눈에나 보이는

묘한 다저녁때


당신이 맑은 보석을 맡기고 간

하늘의 전당포에도

물결은 북을 치듯 울렁인다


객지가 이렇게 넓은데

찾으러 올 일을 생각해보는 때마침의 노을빛이란

망연한 인연의 이목구비일는지 모른다


눈을 뗄 수 없어 끝이 안 나고

발이 떨어지지 않아 지지 않는

이별들


가는 자에게나

남는 자에게

꽃다발은 묶이지 않는 꽃들을 남겨둔다


노을은

당신의 애달은 얼굴을 메우고 흘러내린다

섬섬옥수라는 굳은 데와 터진 데를 다 지난다


퉁퉁 부은 눈으로 왔다는 사실과 상관없이

점성(占星)으로는 사랑운이 아직 있다고 이야기해줄 것이다


밤이면 요 위로 나란히 괴어들던 우리도

어느 한쪽의 소식이 끊어져

한동안 서로 인질을 놓치는 사이


어린 어머니여

내가 갈 때까지

육신이라는 화단은 더 망치지 마시구려



*시집, 사랑은 살려달라고 하는 일 아니겠나, 문학동네








하루 - 황학주



계속해서 한곳에 살고 하루가 간다

정신이나 밥상을 차리는 일일까 다 같은 이름일까 하루란


입는 옷은 같지만

날마다 길이가 달라지는 세상 한 귀퉁이에 걸친 채 뻗대고 살고


벽에 걸린 몸의 윤곽은 아픈 데를 다린 것이다

살아서 죽기까지 하던 날도 있었지만

숱하게 죽어서 살아가는 일이라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때 참, 괴로움의 궁극에 내는 신음 소리가 유리했던 건 사실이나

그런 시간도 간 곳 없고


누구나 시간에 말려

결사를 몇 번이나 하는 순간을 사는 건데


오늘까지는 변화가 빠진 것 같고

내일부터는 변화가 없을 것 같다


물크러지는 냄새에

영혼인가 싶어 제 살 속으로 젓가락을 찔러봤던 잘못이 가장 이상하다


하루치 재난을 훔쳐

십자목에 달린 두 팔과 두 다리를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다




'한줄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액자, 동백꽃 - 이명우  (0) 2020.04.28
길거리에서 기다리다 - 조항록  (0) 2020.04.28
참 더러운 중년이다 - 이중도  (0) 2020.04.26
어떤 인연 - 정일남  (0) 2020.04.23
벙어리 햇볕들이 지나가고 - 전동균  (0) 2020.04.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