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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목소리 - 조성국

저녁 목소리 - 조성국 고매(古梅)향 걸터앉은 툇마루 호듯호듯 끓는 볕살이 좋다 치자 빗밑이 무거운 연둣빛 파초 잎 빗방울 긋는 소리도 좋고, 누렇게 욱은 솔이파리 가만 뒤흔드는 오랍들의 바람 소리도 좋다 치자 한껏 달빛 내비치는 대밭 나직이 서걱대는 이파리 소리도 좋고 갓밝이 무렵이나 어슬막 고샅 탱자울에서 재갈재갈거리는 오목눈이 참새 소리도 좋다 치자 제아무리 좋다 쳐도 풀어놓은 닭들을 구구구 불러 모아 먹이를 주는, 주린 집개가 허천뱅이별을 바라보며 눈동자 빛내는 그맘때를 훌쩍 뛰어넘어 실컷 놀던 나한테 하얗게 새하얗게 밥 짓는 연기 나지막이 펴져 오듯 밥 먹으라, 데리러 오는 저녁 목소리가 나는 이 세상에서 제일 좋았다 *시집/ 나만 멀쩡해서 미안해/ 문학수첩 봄밤 - 조성국 대뜸 찾아와서는 승속..

한줄 詩 2020.05.21

봄날은 간다 - 최성수

봄날은 간다 - 최성수 잘 있거라, 눈부신 새잎의 시간이여 숲 아래서 더 깊어지는 그늘의 자리여 오래 춥고 잠시 따사로웠던 짧은 시절은 이렇게 잠들고 말리니 냉이꽃대 단단하게 힘 오르고 잡초들 더 굳세게 땅바닥 움켜쥐고 견디는 땡볕의 시간이 저기 다가온다 피어서 사랑스럽지 않은 꽃이 어디 있으랴 봄날에 빛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으랴 나 또한 그렇게 사랑스럽고 빛났으니 이제는 툭툭 자리를 털고 떠나야 할 때 그러니, 잘 있으라 덧없고 쓸쓸한 시절 또한 잘 있으라 꽃은 지고, 바람은 불고, 이렇게 봄날은 간다 *시집/ 물골, 그 집/ 도서출판 b 물골*. 그 집 - 최성수 종일 아무도 오지 않을 것 같은 물골 그 집에 앵두꽃 피었다 문은 잠겨 있고 저 혼자 봄바람에 팔랑거리는 현수막 '감자전 한 접시 (3..

한줄 詩 2020.05.21

나도 한때는 요즘 애들이었다 - 권혁소

나도 한때는 요즘 애들이었다 - 권혁소 권 선생, 잊지 말게 그대도 한때 교복 단추 한두 개쯤 풀어놓고 검은 운동화 꺾어 신던 요즘 애들이었네 교납금 미납으로 학교에서 쫓겨나 울 엄마가 가난하지 내가 가난해, 씨발 까닭 모를 질문 세상에 게워내던 빡빡머리였다는 사실, 잊지 말게 그대도 한때는 무서운 요즘 애들이었네 잊지 말게, 요즘 애들이 커서 끝내는 광장이 된다는 사실 나라가 된다는 진실 *시집/ 우리가 너무 가엾다/ 삶창 중학교 선생 - 권혁소 백창우의 동요 '내 자지'를 너무 무겁게 가르쳤다고 학부모들에게 고발당했다 늙어서까지 젖을 빠는 건 사내들이 유일하다고 떠도는 진실을 우습게 희롱했다가 여교사들에게 고발당했다 아파트 계단에서 담배 피고 오줌 쌌다는 주민 신고 받고 홧김에 장구채 휘둘렀다가 애한..

한줄 詩 2020.05.21

세상에서 울음이 가장 슬픈 새 - 이봉환

세상에서 울음이 가장 슬픈 새 - 이봉환 한참을, 뒷산이 내 뒤에 배경처럼 앉아 있었고 또 한참을, 멧비둘기 한 마리 날아와 곁이 되어 있었다 무슨 일이 있어서 나른한 봄 여기까지 내려왔니? 왜 자꾸 동구 밖을 기웃거려? 구국구욱 구국국 구욱국 내가 묻고 그가 답하는데 밤새 끙끙 앓던 처가 오늘 새벽 숨을 놓아버렸어 앞산 사는 장모님이 연락받고 오신다기에, 흑흑 아내가 죽었어? 저런, 저런, 애들은 몇이나 되고? 아들 둘에 딸 하나, 가쁜 숨을 몰아쉬며 아내가 그랬어 자기 죽거들랑 새끼들은 꼭 장모님한테 맡겨달라고 그래야 안 굶기고 옷 제대로 입혀 키울 수 있다고 짠한 새끼들 시골 할머니한테 떠맡기는 건 싫지만 뱁새 집에 알 낳고 몰래 도망쳐버린 뒷산 뻐꾸기보다는 낫다고 그래, 그래, 힘내서 잘 살아라 ..

한줄 詩 2020.05.20

몰래 버린 신앙 - 김광섭

몰래 버린 신앙 - 김광섭 양파를 벗길 때 핏줄은 선명해져 봐, 음침한 뿌리 불투명한 일가 돌이킬 수 있단다 돌이켜야지 핏줄은 끊는 것 붉은 망 속의 해골을 확인해도 잊히지 않는 분열된 뚜렷한 혈통 아버지, 몰래 버린 신앙 너는 나를 업신여기는구나 날 잃은 상주여 *시집/ 내일이 있어 우리는 슬프다/ 파란출판 파문 - 김광섭 자유롭고 울창한 그늘을 향해 모든 열매가 상상하는 한 그루 생명이 자란다 빛과 어둠이 서로 깨물며 하나의 목덜미가 되는 삽입의 물결 자기 자신으로부터 구원받고 싶다는 말을 듣고 싶은 인간은 계속 깨어나겠지만 당분간 믿음은 눈부시지 않기 위해 애쓸 것이다 내가 나를 부끄럽다 하는가 알몸처럼 떠오르는 물음 고독한 둘레 나의 사려 깊은 불신은 온순하다 양들은 길을 잃고 태도를 얻는다 인간..

한줄 詩 2020.05.19

거래된 정의 - 이명선, 박상규, 박성철

세상엔 억울한 사람이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행여 나도 이런 상황이라면 속절 없이 감옥에 갈 수 있겠구나 싶었다. 나만 진실하면 되지, 나만 깨끗하면 되지 하는 생각이 이 책에서는 아무 쓸모가 없음을 일깨운다. 영문도 모른 채 경찰서에 끌려가 감금 당한 채 고문으로 만들어낸 죄목들이 참으로 다양하기도 하다. 간첩 만들기, 강간 살인범 만들기, 해고 노동자 죽음으로 몰아가기 등, 이 땅의 경찰과 사법부가 자기들의 주인인 국민을 어떻게 대우하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국민을 주인으로 모시지 않아도 좋다. 그냥 모든 사람은 법 앞에 평등하다는 것만 보여주면 된다. 더 나쁜 건 책임을 면하기 위해 아니면 성과를 올리기 위해 경찰이나 국정원이 조사 단계에서 사건을 조작했다고 치자. 기소를 하는 검찰이나 마지막 ..

네줄 冊 2020.05.19

외로운 별은 너의 것이 아니다 - 김종해

외로운 별은 너의 것이 아니다 - 김종해 떨어지는 잎을 보며 슬퍼하지 마라 외로운 별 그 안에 와서 사람들마저 잠시 머물다 돌아가지 않더냐 봄 여름 가을 겨울 어느 것이든 사라져 가는 것을 탓하지 마라 아침이 오고 저녁 또한 사라져 가더라도 흘러가는 냇물에게 그러하듯 기꺼이 전별하라 잠시 머물다 돌아가는 사람들 네 마음속에 영원을 네 것인 양 붙들지 마라 사람 사는 곳의 아침이면 아침 저녁이면 저녁 그 빈 허공의 시간 속에서 잠시 안식하라 찰나 속에서 서로 사랑하라 외로운 별은 너의 것이 아니다 반짝 빛나는 그 허공의 시간을 네 것인 사랑으로 채우다 가라 *시집/ 늦저녁의 버스킹/ 문학세계사 떠남에 대하여 - 김종해 사람은 누구나 태어나는 순간부터 한 개의 해와 한 개의 달을 무상으로 배당받는다 살아가면..

한줄 詩 2020.05.19

눈물의 씨앗 - 황형철

눈물의 씨앗 - 황형철 앉으려면 힘없이 쓰러지고 빙글빙글 원을 그렸다 그래 지구는 둥그니까 어떤 축이 있어 하루 한 번씩 회전하는 거라고 배웠으니까 돌고 도는 게 인생이라고 늦게나마 깨달았으니까 어지럽다는 것은 눈물이 많다는 증거 태생적으로 둥글기만 하여 구를 수밖에 없는 성질이어서 자꾸만 원심력이 몸 안을 도는 것이어서 일종의 소용돌이고 자전이고 순리다 도처에 우왕자왕, 눈물이 범람할 징조다 누군가의 눈물을 닦아준다는 것은 어지럼증 덜어 몸을 일으키고 어둔 구름의 한쪽을 걷어 사막에서 잃은 별자리를 되돌려주는 것일 텐데 잘못 받아든 점괘처럼 안절부절 못하고 정처 없이 길을 떠나는 것도 실은 눈물이 구르는 힘 눈물을 가지고 살아가는 자의 숙명 *시집/ 사이도 좋게 딱/ 걷는사람 바위무덤 - 황형철 하루하..

한줄 詩 2020.05.18

측백나무 그 별 - 정병근

측백나무 그 별 - 정병근 비 온 다음 날 측백나무 갈피에 한 무더기 별이 내려앉았다 삼천대천을 날아 겨우 불행의 연대에 도착한 것들 여기는 기억의 피가 도는 땅 이별의 체온이 상속되는 곳 쉽게 입이 삐뚤어지고 뼈가 뒤틀리는 건 허기를 후비는 바람 때문 눈은 한쪽으로만 기울지 생각하지 마라 왔던 곳으로 돌아가려면 굽은 다리와 꼬부라진 등으로 측백측백측백을 하늘의 별만큼 외어야 한다 바람에 흔들리는 측백나무 어린 머릿내가 코를 찌른다 울타리 밑에 분분한 덩굴장미 꽃잎 꽃이 피고 지는 별에 살았다고 구전하리라 물의 비가 내리는 지붕 밑에서 밥이라는 밥을 먹었다고 들려주겠다 일생이 온통 너였던 측백나무 그 별 *시집, 눈과 도끼, 천년의시작 향하여 - 정병근 내 몸과 말이 어디론가 향하는 것은 그곳에 네가 있..

한줄 詩 2020.05.18

비문증의 날 - 윤의섭

비문증의 날 - 윤의섭 모기가 아니라 문자가 날아다닌다고 풀이해 보면 이 증상의 덕목은 해독 불가능한 무정형에 있다 동공에 둥지를 튼 새들 홍채의 숲까지 날아가서는 잡히지 않는 암호가 되기도 하는 투명한 물속에 가라앉다 번지는 잉크이거나 산허리에서 흩어져 간 구름 아니 날개를 펼친 나비이거나 흐릿한 얼굴이거나 망막의 수평선으로 떨어지는 달을 바라본다 떠오르지 않는 기억 속에서 나는 여전히 소원을 빌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다만 주어가 불투명한 비문(非文)이었으므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일이 계속 이루어졌다 나는 눈이라는 행성에 누군가를 두고 온 것이다 유리체의 곡면을 타고 나비는 대륙을 횡단하는 중이다 나비였는가 나비는 왜 잠들지 않는가 동공에 떠다니는 점문은 왜 꿈속에서만 읽을 수 있는가 눈물인지 핏..

한줄 詩 2020.05.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