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줄 冊

나의 장례식 - 임준철

마루안 2020. 4. 30. 18:57

 

 

 

제목부터 마음을 확 휘어잡는다. 제목에 낚이든 내용에 낚이든 이 책은 서문만 읽어도 본전은 건질 수 있는 책이다. 저자인 임준철 선생은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인데 한우물을 파고 있는 우직한 학자다.

대중과 많이 접촉하는 도올 선생 빼고는 한문학과 친숙하게 하는 저서가 많지 않은데 이 책은 대중과의 거리를 좁힐 수 있는 귀중한 저서다. 내가 죽음에 관한 책을 유난히 좋아한 탓도 있겠지만 참 흥미롭게 읽었다.

한문학자인 저자의 번역 실력도 이 책의 진가를 더 배가 시킨다. 모든 책이 그렇겠지만 외국어를 다루는 학자라도 우리 글 실력이 제대로 받쳐줄 때야 빛이 난다. 한문학도 우리 글 아니냐고 할지 모르나 엄연히 중국 글이다.

다만 우리 조상들이 한글은 천한 문자라 무시하고 중국 글을 열심히 배운 덕택에 한자가 마치 우리 글처럼 느껴질 뿐이다. 양반이어도 서출이면 관직에 나갈 수 없을 정도로 엄격한 신분 사회에다 중국을 떠받들어야 출세를 할 수 있었다. 당연 정치적, 문학적 스승들은 공자, 맹자, 유방, 제갈량이거나 이태백, 소동파, 도연명 등 중국인이었다.

이 책은 <나의 죽음 소유하기>라는 부제를 단 自挽詩에 관해 연구한 내용이다. 자만시가 생소한 단어이긴 하나 이전에 저자는 <내 무덤으로 가는 길>이라는 빼어난 자만시 모음 책을 낸 바 있다. 한국의 자만시 전문가라 해도 되겠다.

스스로 쓴 만시(挽詩)라는 뜻의 자만시는 自挽, 自輓 외에도 살아 있는 사람에 대해 쓴 만가라는 의미의 生輓歌, 스스로 쓴만사란 의미의 自挽詞, 自作挽詞, 自撰挽詞 등으로 불렸다.

한문학이 그렇듯 자만시도 중국 문인들의 영향을 받거나 모방해서 쓴 시다. 한국의 자만시는 조선조에 들어와서야 확인이 되는데 저자는 추강 남효온의 자만시를 주목한다. 추강집을 쓴 남효온은 연산군 때 갑자사화로 부관참시를 당하기도 했다.

스승 김시습과 함께 생육신이기도 한데 평생 관직에 오르지 않고 학문 연구와 전국 유랑으로 일생을 마쳤다. 남효온은 서른 여덟이라는 짧은 생을 살다 갔지만 여러 저서를 남겼다. 남효온의 만시는 스승 김종직에게 보낸 편지에 첨부한 글이다.

김시습과 비슷한 연배의 김종직 또한 연산군 때 세상을 발칵 뒤집은 무오사화의 단초가 된 당사자로 무덤에서 불려 나와 부관참시를 당했다. 남효온은 두 스승 김시습과 김종직이 아끼고 존중했던 애제자였다. 그의 자만시 일부를 옮긴다.

어느새 무덤이 말 앞에 이르고 성명이 저승 명부에 떨어졌구나. 
땅강아지와 개미가 내 입에 들어오고 파리 모기 떼 내 살을 빨아대네. 
새로 꼰 새끼줄로 내 허리를 묶고, 해진 거적으로 내 배를 덮는구나. 
다섯 딸은 아버지를 찾아 울고, 아들 하나는 하늘 부르며 곡하며, 
어린 종은 와서 박주를 올리고, 승려는 찾아와 명복을 빌도다.  -1장 일부 

마치 자신이 죽어서 장례식을 보고 있는 것처럼 생생한 문장이다. 自挽이라는 단어가 처음 나오는 詩다. 남효온은 죽기 두 해 전인 서른 여섯 살 때 겨울 석달을 꼬박 병석에 누웠다가 이 시를 스승 김종직에게 보낸다. 아마도 1남 5녀를 둔 것 같다.

어찌 알리오 사후의 즐거움이, 생전의 재앙보다 더 나은 줄을. 
내 일찍이 인간의 몸이었을 때, 온 세상이 쓸모 없는 재주를 비웃었네. 
현명한 이는 나의 방랑함을 미워하고, 귀인은 나의 영락함을 능멸했지. 
서른여섯 해를 사는 동안, 언제나 세인의 시기를 받았네,   
사후의 복이 누가 나와 같을까. 나를 위해 재물 허비하지 말지어다.  -3장 일부 

아득히 찬비는 내리고, 참담하게 음산한 바람 부네. 
무덤엔 푸른 이끼 돋고, 지전은 빈 가지에 걸려 있네, 
조촐한 제사상 준비해 줄 사람도 없으니, 누가 도사나 승려에게 밥 먹여 보낼까? 
또한 만가를 부를 사람도 없지만, 만가의 가사만 부질없이 남아 있구나.  -4장 일부 

이 책에는 중국의 자만시를 시작으로 조선 초기 남효온의 자만시부터 구한말까지 조선 시대 여러 문인들의 시를 소개하고 있다. 조선 후기 김상연 선생의 자만시는 이렇다.

늙은 홀아비 신세 담박하기가 중(僧)과 같고 
고루하니 어찌 멀리 있는 벗 찾아온 적 있으랴. 
쇠한 눈이라 일찍 온 봄에 더욱 놀라니 
매화 이미 졌지만 살구꽃 아직 남았기에.

지은이 스스로 自挽이라는 제목을 붙였으나 장례에 대해선 언급이 없고 매화와 살구꽃으로 삶과 죽음을 은유하는 싯구가 인상적이다. 저자는 지은이가 본인 사후에도 세상은 변함없이 태어나고 죽는 인생의 유전함을 빗댄 것으로 해석한다.

원문과 비교하면서 읽느라 속도가 많이 더뎠다. 한자 실력이 달려서 원문만 있었다면 제대로 읽을 수 없었을 것이다. 배움이 모자란 탓이 크지만 우리 조상들 문자인 한문이 내게는 외국어다. 임준철 선생 같은 부지런한 학자 덕분에 좋은 책 읽었다.